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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83) 거지와 중국문화(1)

역사학자 여영시(余英時)는 8편의 논문을 종합하여 『사(士)와 중국문화』를 편찬하였다. 비교적 계통적이며 깊이 있게 역사상 ‘사(士)’ 계층과 중국문화의 관계를 해부하였다.

 

중국역사상 ‘거지’는 사회단체다. 하층사회 중에서도 작은 층면에 불과하다. ‘사(士)’처럼 중국민족문화 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더라도 거지 현상은 난감한 사회문제 중 하나다. ‘거지문화’는 비정상적인 변태문화이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다.

 

이 ‘거지’ 문제는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그리 주의를 받지 못했다. 당대에 와서 거지의 직업화가 갈수록 현저해지고 거지 현상이 사회 치안에 해를 끼치면서 관련된 분야와 언론계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다음 몇 가지 보도를 먼저 보자.

 

1985년, 광주(廣州)시에 거지 12,662명이 있다.

 

1987년, 광동(廣東)성에서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 29,600명을 수용하고 심사 후 783명이 살인, 강도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색출해 냈다.

 

1986년, 주해(珠海)시가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을 수용한 숫자가 1979년보다 10배나 많아졌다.

 

1986년, 하얼빈(哈尔滨) 철도 공안부에서 적발해 체포한 각종 형사사건 범죄자 중 30%는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이었다.

 

1980년 이전에 대륙에서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 중에서 80%는 살아갈 방도가 없어 고향을 떠나 걸식하는 사람이었다. 현재는,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어 밖에서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사람은 20%이다.

 

이러한 숫자는 모두 신문 등에서 공개적으로 공표한 사실이다. 『인민일보』(해외판), 『경제참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숫자 자체는 당대 중국 거지의 직업화와 범죄화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숫자 뒤에 숨겨진, 반영되지 않은 문제는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몸서리치게 만든다.

 

“밖으로 나가 밖에서 떠돌면, 먹고 자고 입는 것은 걱정 없다네. 한 번 밖에 나가면 모든 것이 풍족하다네. 3년을 밖에서 떠돌고 돌아오면 집을 지을 수 있다네.”

 

이것은 당대의 거지들이 응얼거리는 노랫말이다. 거지들이 ‘사업에 성공’하여 단맛을 맛보고 실제 혜택을 받은 것에 대한 사실적 묘사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호남 A촌에서 광동에서 구걸하다가 귀향한 사람 중의 약 50%가 집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1986년 가을에 무한(武漢)시 민정 공안부가 대수용, 대송환을 실행하지 않았다면 황학루(黃鶴樓) 아래에서 중국 거지 역사상 기적적인 ‘전국 거지 대표대회’가 거행되고 전국적인 거지 수령이 선출되었을 것이라 전한다.

 

이 사실은 여러 보도 매체에서 보도한 내용이다. 현재 거지 구성원을 보면 빈곤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노약자, 장애인 등의 빈민이 아니다. 거지처럼 행동하는 부랑자요 불량배가 다수다.

 

이러한 여러 가지는 거지가 놀라울 정도로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거지는 사회의 공해(公害)로 시급히 종합적으로 정리해야 할 대상이 됐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천부의 나라라 일컬어지는 사천지역에서 온 ‘거지 러시’, 빈곤으로 유명하면서도 역대 여러 왕조의 ‘혁명근거지’라거나 ‘발상지’로 유명한 지역에서 온 ‘거지 러시’,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까지 전국적인 3년 재해 기간에 동북지방으로 대대적으로 쏟아져 들어간 ‘맹목적인 러시’(盲流潮)를 연상케 한다. 동시에 청대 말기에 침략자의 공격을 방어하려고 ‘폐관 쇄국’해 대문을 걸어 잠근 후 국외로 빠져나가 유랑하는 중국 거지를 떠올리게 한다. 역사기록은 이렇다.

 

“광서 때에 변방을 지키는 관리가 1)이민실변(移民實邊)이라 부르는 이주민들로 변방을 채우는 정책을 상주하였다. 그래서 호북 2)흥국주(興國州)의 빈민 수만 명이 처와 자식들을 인솔해 흑룡강으로 갔다.

 

담당 관원은 안치할 방법을 전혀 전해 듣지 못했다. 종자도 구비하지 못했고 숙소도 만들지 못했다. 농사를 지으려 했으나 농지가 없었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여비가 없었다. 이에 거지로 전락해 버렸다.

 

한참 지나 외국이 부유하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시베리아 철도의 궤도를 따라 걸었다. 유럽으로 향했다. 러시아 사람들이 싫어하여 길을 막고 낮은 등급의 기차에 싣고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돌아왔어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자 다시 길을 떠났고 러시아 사람들은 또다시 차에 싣고 돌려보냈다.

 

돌아오고 나서 수개월 후에 다시 길을 떠났다. 러시아로 간 다음 프랑스로 갈 방법을 모색하였다. 모두 육로로 걸어서 갔다.

 

선통 신해 때, 서신육(徐新六)이 유럽에서 유학할 때에 파리에서 하루 묵었다. 프랑스 사람과 함께 시내를 여행할 때에 걸식하는 중국 남녀들을 만났다. 고향을 물어보니 흥국주 사람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북을 치는 사람도 있었고 칼을 날리며 춤추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남루하였다.

 

부녀자 중에서 전족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구경하면서 즐긴 후에 곧바로 프랑을 던져주었다. 그것은 나라의 치욕이었다. 천금을 모은 사람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 중에도 거지 두목과 같은 지도자가 있어 대중의 자금을 모으고 먹여 살렸다. 서양 옷을 입고 경찰과 결탁해 상납하면서 수천 금을 모은 것이다.”3)

 

이로부터 1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중국 대륙의 거지가 또다시 해외로 나가 걸식하고 있을까? 아직까지 정식적인 보도는 보지 못했지만 중국 민족의식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러한 ‘국가의 수치’ 현상은 나타나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민족의 자존, 자중, 자강, 자애의 전통심리를 크게 손상시키게 될 것이고 미덕이 손상될 것이다. 중국은 아직까지는 국가에서 인정하는 난민을 내보낸 적이 없다. 위기를 인민에게 뒤집어씌우는 정책이나 관례도 아직까지는 없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이민실변(移民實邊)은 중국 역사상 관방에서 조직한 인구 이주 방식이다. 역대 한족 중앙정권은 ‘둔간수변(屯墾戍邊)’ 정책을 시행하였다. 변방 요지에 군대를 주둔하고 둔전에 참가하는 것 이외에 더 많은 것은 내지에서 변경지대로 이민시키는 것이었다. 군대의 보호 아래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군량을 제공하고 변경 방위를 강화하였다. 이런 형식의 인구 이주는 진한(秦漢) 때부터 줄곧 이어져 내려왔다. 중국의 서북부가 중점 지역이었다.

 

2) 흥국주(興國州)은 원대(元代)에 설치한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호북성 양신현(陽新縣), 대야시(大冶市), 통산현(通山縣) 지역이다. 주부(州府)는 호북성 양신현에 있었다. 지금은 양신현 흥국진(興國鎭)이다. 송대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에 강서성 공현(贛縣) 7향을 나누어 흥국현을 설치하였는데 이곳은 호북성의 흥국주와는 다르다.

 

3) 『청패류초(淸稗類鈔)·걸개류(乞丐類)·흥국인행걸지구(興國人行乞至歐)』(中華書局)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국립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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