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와 영화가 유독 많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제주 콘텐츠를 바라보는 시선은 확연히 달라졌다. 더 이상 제주가 단순한 촬영지가 아니라는 점에서다.
한때 제주 영상물은 아름다운 바다와 유채꽃, 오름을 비추는 데 그쳤다. 이국적인 풍경은 있었지만 이야기는 다른 곳에 있었다. 제주가 있어도 제주 사람은 없었고, 제주 문화는 배경 소품에 머무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제주가 달라지고 있었다.
1999년 개봉한 영화 '연풍연가'는 제주 콘텐츠의 초창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박대영 감독이 연출하고 장동건과 고소영이 출연한 이 영화는 산굼부리와 송악산, 바다와 오름을 담아내며 '제주 감성'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당시 제주가 보여준 것은 풍경이었다.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는 화면 뒤편에 머물렀다.
2003년 방영된 SBS 드라마 '올인'은 제주 콘텐츠의 또 다른 분기점이었다. 이병헌과 송혜교, 지성이 출연한 이 작품은 섭지코지를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드라마 세트장은 수년간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당시만 해도 제주는 이야기의 중심이기보다 아름다운 배경이었다. 드라마가 끝난 뒤 관광객이 몰려들었고, '드라마 관광'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제주 콘텐츠도 진화하기 시작했다.
2009년 MBC 드라마 '탐나는도다'는 해녀 문화와 조선시대 제주를 배경으로 제주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담아냈다. 서우와 임주환, 황찬빈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은 제주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를 가진 공간임을 보여줬다.
2012년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는 제주 콘텐츠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제주4·3 당시 동굴에 숨어 지낸 주민들의 삶을 제주어와 흑백영상으로 기록한 이 영화는 2013년 미국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제주의 아픈 역사가 지역을 넘어 세계인에게도 공감을 얻을 수 있음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결정적인 변화는 OTT 시대와 함께 찾아왔다.
2022년 방영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를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세웠다. 이병헌과 신민아, 한지민, 김우빈, 고두심 등 화려한 배우진이 출연한 이 작품은 해녀와 선장, 시장 상인들의 삶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풀어냈다. 제주어가 대사로 자연스럽게 등장했고, 해녀의 삶은 특별한 소재가 아닌 일상의 이야기로 그려졌다. 제주라는 공간이 가진 공동체성과 인간미가 전국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2022년 공개된 티빙 드라마 '아일랜드'는 제주 신화와 설화를 현대 판타지로 재해석했다. 김남길과 이다희, 차은우가 출연한 이 작품은 탐라 신화와 제주 전설을 글로벌 콘텐츠로 확장했다.
2023년 JTBC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는 제주 출신 인물들의 귀향과 치유를 그리며 제주 마을 공동체의 정서를 담아냈다. 지창욱과 신혜선이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고향 제주'가 가진 의미를 따뜻하게 풀어냈다.
그리고 최근 제주 콘텐츠의 정점을 보여준 작품이 등장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는 제목부터 제주어를 전면에 내세웠다. '수고 많으셨습니다'를 뜻하는 제주어 제목은 국내는 물론 해외 시청자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이유와 박보검이 출연한 이 작품은 제주 여성의 삶과 가족, 공동체의 역사를 담아내며 제주 이야기가 세계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여기에 제주를 무대로 한 새로운 콘텐츠도 잇따르고 있다. 제주어로 친척과 혈연, 공동체를 의미하는 '궨당'을 제목으로 한 드라마 제작도 추진되며 제주만의 공동체 문화가 새로운 콘텐츠 자산으로 주목받고 있다. 과거에는 낯설게 여겨졌던 제주어와 지역문화가 이제는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 되고 있는 셈이다.
과거 콘텐츠 산업의 공식은 '보편성'이었다. 지역색이 강할수록 대중성과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글로벌 OTT 시대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콘텐츠가 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제주만큼 이야기가 많은 곳도 드물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인 해녀문화가 있고, 수천 년의 탐라 신화가 있다. 제주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이 있으며 제주어와 궨당 문화라는 독특한 공동체 문화가 살아 있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은 제주만의 삶의 방식과 기억을 만들었다.
이런 자산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제주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축적해온 삶의 기록이다.
그래서 제주 콘텐츠의 경쟁력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오름과 바다만으로는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그 안에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와 기억이 더해질 때 비로소 콘텐츠는 힘을 얻는다.
관광산업이 정체 국면에 접어든 제주에 콘텐츠 산업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고 있다. 관광객은 계절과 경기의 영향을 받지만 콘텐츠는 한 번 만들어지면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소비된다. 촬영지가 관광지가 되고, 이야기가 산업이 되는 시대다.
이제 제주가 던져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얼마나 많은 관광객이 오느냐가 아니라, 제주만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담아낼 수 있느냐다.
풍경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이제는 그 풍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가 제주 미래의 경쟁력이 될 차례다. 제주가 세계에 보여줘야 할 것은 푸른 바다가 아니라, 그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제이누리=이기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