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아노 감독이 영상으로 옮긴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 유희극’이자 ‘지적 미로’와 같은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도사는 도서관장 호르헤 수도사가 설치해 놓은 미로 같은 기묘한 길을 어지럽게 돌아 마침내 ‘출구’에 도착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마저도 출구는 아니었다.
주인공인 윌리엄 수도사는 그것이 출구라고 생각했지만 최후의 파수꾼인 호르헤 수도사가 그 출구를 막아선다. 최후의 파수꾼 호르헤는 출구를 열어주느니 차라리 도서관을 불태워버리는 쪽을 택한다. 결국 윌리엄 수도사가 그 미로를 빠져나온 것은 출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불에 타 무너진 잔해를 헤치고 빠져나온 셈이다.
그제야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장미의 이름’인지 납득할 수 있게 된다. 호르헤 수도사가 미로의 끝자락에서 도서관을 모두 불태워버리면서까지 윌리엄 수도사와 ‘최후의 드잡이’를 벌인 이유는 바로 ‘이름’의 문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편’을 호르헤 수도사는 그토록 목숨 걸고 감추려고 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라면 수도원의 동료 수도사들을 거리낌 없이 독살할 수 있었던 것도 신앙이라는 이름을 수호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호르헤 수도사는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할 ‘질서와 엄숙성’이라는 또 다른 이름에 목숨을 건다. ‘웃음’은 질서와 엄숙성을 근본부터 무너뜨린다고 믿는다. 호르헤 수도사는 신앙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신앙’이라는 ‘이름(명분)’과 ‘웃음’이라는 실재實在가 충돌한다. 웃음이라는 실재는 사실상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신앙이라는 이름의 감옥 속에 갇히면 신앙의 엄숙성을 지키기 위해 웃음은 신성모독이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랑하는 김춘수 시인은 서로가 불러주는 이름이라는 것을 대단히 아름다운 것으로 노래했지만, 에코는 이름이라는 ‘기호記號’를 대단히 난폭하고 위험한 것으로 여긴다. 에코가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에도 식견을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에코가 공자의 정명 사상을 접했다면 펄쩍 뛰었을지도 모르겠다.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 등판시킨 호르헤 수도사는 어쩌면 에코가 공자에게 던지는 문제 제기일지도 모르겠다. 기호학적, 구조적 관점에서 호르헤는 공자가 꿈꿨던 ‘정명의 기획’이 극단적인 독재와 광기의 집착으로 타락했을 때 탄생하는 괴물의 완벽한 구현이다.
공자의 ‘정명’은 세상의 대혼란(춘추전국시대)을 막기 위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규격화한 이름의 옷을 입히려는 기획이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답기(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를 요구한다.
이 촘촘한 이름의 질서망을 갖추면 세상의 조화가 달성되리라 믿었다. 호르헤 역시 세상의 타락과 혼란을 막기 위해 신자는 ‘신앙’이라는 단 하나의 거룩한 기호(이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공자는 「논어」 ‘자로편’ 3장에서 공자의 핵심 정치철학이라 할 만한 정명 사상을 설파한다. 위나라 군주가 공자에게 정치를 맡기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 자로가 “사부님께서 정치를 맡으신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반드시 이름부터 바로잡겠다 (必也正名乎)”고 즉답한다.
윌리엄 수도사처럼 현실적이었는지 자로가 갸우뚱하자 공자가 풀어 설명한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뤄지지 않고,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예악(문화와 제도)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올바르지 못하게 된다. 형벌이 올바르지 못하면, 백성들은 손발을 어디에 둘지 모르게 된다(民無所錯手足).”
공자식으로 말하자면 교황은 교황답고, 수도사는 수도사다워야 하고 신자信者는 신자다워야 한다. ‘경건함’이라는 신앙의 이름에 충실하기 위해 웃음까지도 금지한다. 호르헤는 그렇지 않으면 공자님 말씀처럼 ‘신자들이 손발을 둘 곳을 모르게 될 것’을 걱정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장서관의 고대문헌을 필사筆寫하는 몇몇 불경한 ‘필사 수도사’들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희극편을 몰래 열람하고 키득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호르헤가 부여잡고 있던 경건함이라는 신앙의 이름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림을 느낀다.
이 불경ㆍ불온한 수도사들은 ‘신앙인’답지 못한 자들이다. 호르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책장에 독을 발라 신앙의 이름에 걸맞지 않은 이들을 독살한다. 공자의 ‘정명 철학’이 2500년의 시간과 공간을 건너 14세기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가장 파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는 12세기 중세의 학자이자 수도사였던 베르나르 클루니(Bernard of Cluny)의 유명한 라틴어 시詩 한 구절로 마무리된다. 영화 속에서 윌리엄 수도사를 보좌하던 앳된 견습 수도사 아드소(Adso)가 훗날 이름에 사로잡혀 광기를 뿜어내던 호르헤 수도사의 장서관 방화 사건을 회고하며 베르나르의 라틴시 “Stat rom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과거의 로마는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로마라는 빈껍데기 이름뿐)”를 읊으며 영화가 끝난다.
에코는 베르나르의 원래 시에 들어간 ‘Roma’를 ‘Rosa’로 살짝 바꿔 적는다. 그 자리에 공자가 말한 ‘임금, 신하, 아비, 자식’을 넣든 호르헤가 집착했던 ‘신앙’을 넣든 이름에 집착하는 그 우스꽝스러움은 마찬가지라는 에코의 조롱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오늘도 집착하고 있는 모든 이름들은 모두 본질은 사라진 빈껍데기뿐일 수도 있다는 베르나르의 조롱이다. 이 시의 제목 자체가 ‘De Contemptu Mundi(세상에 대한 조롱)’이다.
지방선거가 막을 내렸다. 문득 베르나르의 라틴 시 Roma 자리에 ‘보수나 진보’를 넣어도 에코의 메시지는 선명하게 전해지는 듯하다. “오래된 보수ㆍ진보는 이름으로만 존재할 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보수ㆍ진보라는 빈껍데기 이름뿐이다.”
지방선거 과정에서 보수ㆍ진보란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경기를 일으키듯 질색한 그 모든 것들이 호르헤 수도사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웃음에 발작하는 황당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니 딱한 일이다.
혹시라도 ‘빈껍데기’만 남은 보수ㆍ진보의 이름 싸움을 하다 영화 속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장서관을 모두 불태워버리듯, 온 나라를 불태워버리지나 않을지 조마조마하다. 공자의 혀 차는 소리가 들리고 에코의 조롱이 들리는 듯하다. [본사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