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사회에서 ‘거지’〔걸개(乞丐)〕는 단순한 빈곤층을 넘어, 제국의 흥망성쇠를 비추는 거울이자 독특한 하류 문화를 형성했던 존재였다. 중국 거지의 역사는 단순한 빈곤의 기록이 아니라, 왕조의 흥망과 도시 경제의 발전, 그리고 종교적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시대별 흐름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춘추전국부터 한나라까지는 초기 형성기라 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하여 구걸하였다. 초기에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농토를 잃은 ‘유민(流民)’들이 일시적으로 구걸하는 형태였다.
오(吳)나라의 오자서(伍子胥)가 복수하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시장에서 퉁소를 불며 구걸했다는 설화가 이 시기 거지의 전형적인 ‘고난’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한나라 때에 수도인 장안 등에 고정적인 빈민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둘째, 당나라 때의 불교의 영향으로 종교와 복지가 결합하였다.
불교가 국교 수준으로 숭상되면서 ‘보시(자선)’ 문화가 정착했다. 사찰 주변에 거주하며 시주를 받는 거지가 급증했다.
국가 차원에서 최초의 구휼기관 ‘병방(病坊)’ 등 빈민과 병자를 수용하는 기관을 운영하여 거지를 제도권 안에서 관리하려고 했다.
셋째, 송나라 때에는 거지가 조직화 되고 직업화 되었다. 송나라에 와서 도시경제가 발달하고 상업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거지가 하나의 ‘직업’으로 고착화되었다.
거지 왕〔개두(丐頭)〕이 등장하였다. 거지들이 구역을 나누고 조직을 관리하는 자치 조직이 생겨났다. 이들은 명절이나 경조사에 돈을 받는 대가로 소란을 피우지 않는 등의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상업적 구걸이 성행하였다. 단순히 구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 춤, 기예를 선보이며 돈을 받는 ‘예능형 거지’가 등장했다.

넷째, 명·청나라 때에는 구조화 되었다 문화적 완성을 이뤘다.
엄격한 계급화가 이루어졌다. 거지 조직은 더욱 공고해져서 ‘개방(丐幇)’과 같은 형태가 실질적인 사회 하층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적 도구가 되기도 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거지 출신이었던 만큼, 이 시기 거지는 때로 정치적 정보원이나 군사 보조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문학적 상징이 되었다. 이때부터 무협 소설이나 민간 설화에서 거지는 ‘세속을 초월한 고수’나 ‘의로운 무리’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고대 거지의 역사는 ‘어떻게 하면 굶지 않고 조직적으로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처절한 생존전략의 진화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역사성을 가진 거지는 ‘사회의 지표’ 역할을 하였다.
거지는 한 왕조의 건강 상태를 알리는 신호였다. 중국 고대 정치에서 거지의 등장은 ‘천명(天命)’의 위기를 의미했다. 태평성대에는 거지가 적었고 난세나 폭정기에는 유랑민이 급증하여 거지 떼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거지는 결국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유민(流民)’의 종착지였다. 가혹한 세금, 가뭄, 전쟁으로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거지가 되었다.
그렇기에 통치자들은 거지가 너무 많아지면 민심 이반과 반란의 전조로 받아들여 민감하게 반응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거지는 시험과 공덕의 대상이었다. 불교와 도교의 확산은 거지에 대한 인식을 ‘사회의 골칫덩이’에서 ‘수행과 자비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도교의 신선설화에 따르면 신선들이 추레한 거지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의 도덕성을 시험한다는 설화가 많다. 팔선(八仙) 중 하나인 이철괴(李鐵拐)가 대표적이다.
불교 보시(布施)의 방편이기도 했다. 거지에게 적선하는 행위는 개인의 업보를 닦고 공덕을 쌓는 가장 쉬운 길로 여겨졌다.
하층민인 거지는 결국 조직화 되었다. ‘개방(丐幇)’이 그것이다. 무협 소설 속 ‘개방’은 허구지만 실제로 중국 고대에는 거지들의 자치 조직이 존재했다.
송나라와 명나라 시대에는 거지들을 관리하는 ‘개두(丐頭)’나 ‘단주(團主)’가 존재했다. 그들은 구걸하는 구역을 나누고 분쟁을 조정했다.
또한 거지는 정보의 유통망 역할을 했다. 길거리에 상주하는 특성상, 거지들은 성 안팎의 모든 소문을 수집하고 유통하는 ‘바닥 민심의 정보센터’ 역할을 했다.
그런 거지는 ‘비참’과 ‘자유’라는 이면적인 문화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거지는 문학적으로도 두 가지 극단적인 이미지를 가진다. 하나는 비극적 현실이다. 두보(杜甫)와 같은 시인들의 시에서 거지는 백성의 고통을 상징하는 비참한 존재로 묘사된다. 다른 하나는 해탈의 상징이다. 비참함과는 반대로 세속의 명예와 부를 버린, 구속 없는 삶을 사는 ‘자유인’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결국 중국 고대 거지는 제국이 돌보지 못한 그림자인 동시에, 사회 전체의 자비심을 측정하는 척도였다. 그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시대의 진실을 목격하던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이철괴(李鐵拐)는 도교의 여덟 신선(팔선) 중 가장 파격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이다. 겉모습은 초라한 ‘절름발이 거지’이지만 속은 깊은, 지혜를 가진 반전 매력의 소유자이다.
이철괴는 처음부터 거지는 아니었다. 원래는 풍채 좋고 잘생긴 도사였다. 어느 날 이철괴는 스승인 태상노군을 만나러 영혼만 몸 밖으로 나가는 ‘유체이탈’ 수련을 떠난다. 제자에게 “7일 동안 내 몸을 잘 지키고, 만약 7일이 지나도 안 오면 화장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6일째 되는 날, 제자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온다. 마음이 급해진 제자는 하루를 못 참고 스승의 몸을 화장해 버리고 고향으로 달려가 버렸다. 7일째 돌아온 이철괴의 영혼은 타버린 자신의 몸 대신, 근처에서 막 굶어 죽은 절름발이 거지의 시신 속으로 급히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국립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