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발발 후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던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서거했다. [사진=연합뉴스] 왜군은 남해안의 한복판인 순천에서 오른쪽 끝인 울산까지 줄줄이 왜성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왜성의 흔적은 아직도 남해안 곳곳에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도 순천왜성이 가장 유명합니다. 고금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선 수군 때문에 남해바다 서쪽에는 왜군이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동쪽은 여전히 왜군의 영향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왜군은 남해 섬들의 윗길과 아랫길로 퇴군하려고 했습니다. 노량해전은 1598년 음력 11월 19일, 양력으로는 12월 16일이었습니다. 왜군은 겨울이 다가올수록 고향 생각이 간절해졌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의 겨울은 일본의 겨울보다 훨씬 혹독하기 때문입니다. 왜군은 관음포만 벗어나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7년 동안이나 백성을 유린한 왜군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섬멸돼야 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있었고 또다시 정유재란이 있었으니, 그들이 무사히 돌아간다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새벽에 벌어진 전투 도중, 한 무리의 왜군 선단이 관
▲ 오는 16일 열리는 '제16회 제주 수퍼맨 전국철인3종경기대회' 포스터 중 일부. [제주철인3종협회] 철인(鐵人)들의 축제 ‘제16회 제주 수퍼맨 전국철인3종 경기대회’가 오는 16일 제주시 구좌읍과 서귀포시 성산읍 일대에서 열린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200여 명의 선수가 제주의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에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다. 최고령자는 서울에서 참가하는 윤휘웅(83)씨다. 이 외에도 이희봉(72)씨, 이희찬(72)씨 등 70대 이상 3명이 출전해 노익장을 과시할 예정이다. 참가자들은 수영 3㎞, 사이클 140㎞, 마라톤 30㎞로 구성된 수퍼맨 코스를 제한된 시간 안에 완주해야 한다. 수영은 1시간50분 이내, 사이클은 8시간 이내, 마라톤은 13시간 이내로 제한돼 있다. 수영경기는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제주오션파크 앞바다에서, 사이클 경기는 제주오션파크(성산읍 시흥리)∼시흥리 해녀식당∼구좌읍 세화리 해녀민박 앞∼시흥리 해녀식당 입구에서, 마라톤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와 성산읍 시흥리 해안도로에서 펼쳐진다. 시상은 개인전과 릴레이, 클럽대항전으로 나눠 각각 3
제주 최대 자전거 축제인 ‘2019 제주 그란폰도’가 오는 10월 19일 이호테우해수욕장에서 열린다. 제주도가 주최하고 제주관광공사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제주도 자전거연맹, 한라일보, 이호동주민자치위원회,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 도로교통공단 제주교통방송이 후원한다. 제주관광공사는 제주 자연 및 자전거길 홍보를 위해 2016년 9월 첫 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제주국제사이클링페스티벌’ 행사를 가져왔다. 해마다 700여명의 자전거 동호인과 관광객이 참여해 제주도내 대표 문화관광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매년 참가자 수요를 조사·반영해 올해 대회를 한층 업그레이드하고 새로운 코스를 개발해 100Km의 제주 그란폰도 대회로 재탄생했다. 라이딩 종목은 이호~곽지~한림~대정~어도오름~이호로 이어지는 그란폰도(100km) 코스와 이호테우해수욕장과 곽지해수욕장을 왕복하는 해안가 투어(30Km) 코스로 나눠졌다. 또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키즈바이크챔피언십도 운영된다. 투어코스 및 키즈바이크챔피언십은 무료로 운영된다. 그 밖에 경품과 기념품, 플리마켓 등 다양한 이벤트를 제공한다. 올해 그란폰도는 지
▲ 남해 '이락사(李落祠)'는 충무공 이순신 서거를 애도하기 위한 사당이다. [사진=연합뉴스] 「삼국지연의」에는 서촉을 정벌하던 방통이 적장 장임의 꾀에 넘어가 계곡에서 포위돼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곡에 들어선 방통은 ‘낙봉파(落鳳坡)’라는 글귀를 봤습니다. 그 순간, ‘아뿔싸! 내가 여기서 꾐에 빠져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방통의 호는 봉추(鳳雛)였고, 낙봉파의 낙자는 떨어질 낙(落)자였기 때문입니다. 봉추가 떨어지는 곳이라는 지명을 보고 죽음을 예감한 겁니다. 이순신이 서거하신 관음포가 보이는 뒷산에 그분을 애도하기 위한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의 이름은 ‘이락사(李落祠)’입니다. 이충무공의 이(李)와 떨어질 락(落)을 합쳐서 만든 이름입니다. 이순신이라는 큰 별이 떨어진 곳임을 말없이 알려줍니다. 사당 옆길로 쭉 올라가면 첨망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 멀지도 높지도 않습니다. 조선시대 누각은 아니지만 크고 아름답습니다. 첨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섬들도 절경이죠. 이순신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 치밀한 전술ㆍ전략
▲ 물길이 좁고 수심이 얕은 관음포의 지형은 전투에서 변수를 만들어냈다. [사진=연합뉴스] 만약 임진왜란이 서양 국가끼리의 전쟁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승전국은 패전한 침략국에 거액의 배상을 요구했을 겁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연합국은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렸습니다. 그 액수와 조건이 어찌나 가혹했던지,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하는 원인이 됐습니다. 어쨌든 무장강도가 내 집에 침입해서 재산을 갈취한 뒤 ‘이제 돌아갈 테니 더이상 싸우지 말자’고 하는 말을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순신도 결사반대했습니다. 백성을 짓밟은 왜군을 결코 보내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미온적이던 진린도 이순신의 호소에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명군은 왜군의 뇌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이순신의 수군과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이순신의 절절한 호소에 감화된 것입니다. 그래도 일기 내용처럼 조선 수군이 포획한 왜선과 군량을 명군이 빼앗아가는 일이 드물지 않게 벌어졌습니다.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답답하고 비통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마지막으로 출전(出戰)했습니다. 관음
▲ 함덕해수욕장 제주의 협재, 금능, 이호테우, 함덕, 곽지해수욕장 등 5곳이 다음달 22일 개장한다. 그 외 삼양, 김녕, 신양섭지, 표선, 중문색달, 화순금모래해수욕장은 7월 1일 개장해 8월 31까지 운영한다. 제주도는 해수욕장협의회를 열고 개장 기간, 야간 해수욕장 운영, 안전관리 계획 등 2019년 해수욕장 운영계획을 확정, 30일 공개했다. 해수욕장 개장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다. 야간개장은 오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다. 해수욕장 운영기간 중 협재, 이호테우, 삼양, 함덕해수욕장은 7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야간에도 해수욕장이 운영된다. 안전요원은 해경이 아닌 제주도 등 지자체가 맡는다. 해경은 연안 물놀이 지역에서의 안전사고에 집중, 그 동안 지정 해수욕장에 상주했던 인력을 일반 연안해역으로 돌린다. 지정 해수욕장엔 지자체에서 그 동안 일반 해역에 배치했던 안전요원(75명)을 재배치해 소방전문요원과 함께 안전 관리를 강화하기로 했다. 제주도는 또 △해수욕장 개장 전 민간안전요원의 안전관리 교육 실시 △해수욕장 금연구역 내에서의 흡연행위 금지 계도강화 △백사장 내 애완동물 동반 산책 시 목출착용 및
▲ 한라산 정상과 백록담 [제이누리 DB] 한라산 정상을 방문하는 입산객 수를 제한하는 '탐방 예약제'가 내년 1월1일부터 본격 시행된다. 올 가을부터는 시범 운영에 들어간다. 제주도는 등반객에 의한 훼손 방지를 위해 한라산 탐방예약제를 본격 시행한다고 28일 밝혔다. 한라산은 단풍철 등 등반 성수기에 성판악 코스의 경우 하루 1000명이 몰리면서 생태 환경 훼손이 심해지고 있다. 도는 내년부터 탐방 예약제와 함께 정상 등반인원은 최대 수용능력의 80%로 조정하는 등 앞으로 수용 인원을 최종 확정해 시행하기로 했다. 도는 온라인 시스템으로 등반객을 선착순 선발하고, 적정 인원이 마감되면 더는 접수하지 않는 방식으로 예약제를 운영할 계획이다. 시행 구간은 한라산 성판악 및 관음사 코스에서 정상까지 구간이다. 백록담 정상까지 갈 수 있는 하루 인원은 성판악 코스 720명, 관음사 코스 426명 등 모두 1146명이다. 도가 지난해 실시한 탐방객 수용 방안 용역 결과, 하루 적정 탐방객은 5개 탐방로를 모두 합해 3145명으로 제시됐다. 물리적 수용 인원을 코스 별로 보면 백록담 정상 304명, 성판악 774명, 관음사
▲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숱한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자,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전투다. [사진=연합뉴스] 어제 복병장(伏兵將)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趙孝悅) 등은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무술년 10월 17일, 「난중일기」 중 무술일기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일기입니다. 이충무공전서에 포함된 「난중일기」가 아니라 후손들이 보관해온 일기는 무술년 10월 12일에 끝납니다. 그 마지막 일기는 단 한 줄이었습니다. 나로도에 이르렀다. -무술년 10월 12일, 난중일기 중 『무술일기』 마지막 일기를 남긴 다음날인 10월 18일,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노량으로 출진합니다. 19일 새벽부터 벌어진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숱한 전투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이 노량해전에서 이충무공이 순국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일기는 돌아가시기 48시간도 되기 전에 쓰였을 것입니다.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 원균이 부임한 후 계책을 도모하던 제승당은 애첩과의 밀회 장소로 전락했다. [사진=연합뉴스] 이순신이 주둔하던 당시에는 제승당(制勝堂)이 아니라 운주당(運籌堂)이었습니다. 운주란 ‘계책을 운용하다’는 뜻입니다. 작전 본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이순신은 좋은 계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운주당에 와서 의견을 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후엔 애첩과 밀회를 나누는 장소가 됐습니다. 회의와 협의가 중단됐고, 외부와의 교류와 내부 소통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궤멸당하고, 운주당도 불에 전소돼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150여년이 흐른 1738년(영조 15년)에야, 통제사 조경이 운주당을 중건하고 제승당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처음 원균이 한산도에 부임하고 나서 이순신이 시행하던 규정을 모두 바꾸고 이순신을 보좌하던 장수와 사졸 등을 다 쫓아버렸다. 특히 이영남(李英男)은 자신이 패전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더욱 미워했다. … 원균은 사랑하는 첩과 운주당에
▲ 한산도해전에서 이순신의 유적계에 당한 왜군은 59척의 배가 침몰하고 6000명이 넘게 전사했다. [사진=연합뉴스] 한산도해전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내보냈습니다. 한니발이 전진배치했던 경무장 보병과 같은 역할이었지요.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해적 출신의 수군 명장이었습니다. 다섯척의 판옥선이 이순신의 유적계(誘敵計), 이를테면 유인책일 가능성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와키자카는 자신 있게 주력부대를 모두 이끌고 쫓아왔습니다. 이순신이 유인작전을 썼다 해도 충분히 조선 수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의 함대도 작은 규모가 아니었으니까요.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추격하던 일본 함대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어느새 조선 함대에 포위돼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부터 왜선은 조선 수군의 함포에 두들겨 맞아 하나둘씩 박살났습니다. 때마침 해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 쪽에 유리하게 바뀐 데다, 학익진의 날개에 갇혀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서구의 모든 육군사관학교에서 가르친다는 칸나에전투가 1800여년 후에 한반도 남쪽 바다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한산도대첩을 외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 가르친다는 분들도
▲ 기원전 216년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 군대는 학인진과 유사한 포위섬멸전을 사용해 대승했다. [사진=연합뉴스] 인터넷에 한산도대첩을 검색하면 진주대첩ㆍ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아울러 국제적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긴 전투라는 표현도 종종 등장합니다. 이순신의 학익진과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The Battle of Cannae) 전세계의 해군사관학교에서 한산도해전을 가르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구의 거의 모든 사관학교에서 가르치는 전투가 있습니다.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군이 로마군과 맞붙었던 ‘칸나에 전투’입니다. 전투에서 압승하기 위해선 포위섬멸전이 가장 좋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해도 적군의 주력과 지휘관들을 놓치면, 언제든지 전열을 재정비해서 반격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해 전멸시키는 게 가장 유효한 전술로 꼽히는 이유입니다. 적을 포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속도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 이후로 기병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한신의 군대가 항우의 군대를 몇겹으로 포위해서 섬멸했던 초한전의 마지막 전투는 동양의 대표적인 포위
▲ 이순신은 철저한 정보 수집으로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전투 방식을 사용했다. [사진=연합뉴스] 배설이라는 인물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좋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명령에 불복종해 최소한의 수군 병력을 지켜냈고, 한산도 통제영에 있던 막대한 군사물자가 왜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막아냈습니다. 전란 직후 처형됐지만 6년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증돼 사면ㆍ복권됐습니다. 나름대로 억울했고 군인으로서 노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한산도대첩 : 세계 해전사(史)의 별이 되다 앞서 명량해전을 말할 때, 이순신의 전투 방식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순신의 전투 방식은 철저한 정보 수집을 통해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격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 육군은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순신의 수군은 피해조차 거의 없는 대승을 이어갔습니다. 일본군은 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일본은 원래 해전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수군의 주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수송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수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