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69)...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효현순황후(孝賢純皇后, 1711~1748), 푸차(Fuca, 부찰(富察)) 씨, 차하얼(찰합이(察哈尔)) 총관 이영보(李榮保)의 딸이다. 황태자 홍력(弘歷)에게 시집간 후 적복진(嫡福晉)으로 책봉되고 건륭(乾隆) 2년(1737) 황후에 봉해졌다. 성정이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정중하고 검약했다고 한다. 진주나 비취를 두르지 않아 건륭제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건륭 13년에 죽자 건륭제가 통절했다 전한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둘째 아들과 첫째 딸은 요절했다.

 

건륭황제는 ‘풍류천자風流天子’라 할 만하다. 다정한 군주였다고 한다. 미복을 하고 여러 차례 강남으로 내려갔었기 때문에 야사와 민간에서는 많은 일화를 만들어내 차 마실 때나 식후의 얘깃거리로 삼았다.

 

그의 첫째 황후 푸차 씨의 죽음에 대해 후세 널리 퍼진 『청조야사대관淸朝野史大觀』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고종(高宗, 건륭) 요현황후는 부문충공(傅文忠公) 항(恒)의 누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항의 부인과 고종이 사통하자 후(효현황후)와 여러 차례 반목해 고종과 오랫동안 좋지 못했다. 남순 후 직예(直隸) 경계에 이르렀을 때 황제의 선박에 동숙하다가 우연히 옛일을 거론하면서 황후가 책망했다. 고종이 대노해 물에 빠뜨려 버렸다. 경성으로 돌아간 후 병에 걸려 죽었다고 했으나 내내 가책을 느껴 시호를 효현이라 했다.” 효현황후가 건륭제와 형수가 사통하는 것을 저지하자 고종의 분노를 사 물속으로 떨어뜨려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건륭이 순시하면서 혜주(惠州)에 도착했을 때 선상에서 밤새도록 놀았다. 황후가 다른 배에서 그 소식을 듣고 불상사가 발생할 것을 염려해 건륭제의 배로 건너가서는 강하게 말렸는데 말이 씨가 됐다. 술에 취해 있던 건륭제가 대노해 황후를 질타했다. 황후는 화가 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자신의 배로 돌아가는 도중에 실족해 물에 빠져 죽었다. 술이 깬 건륭제는 황후의 죽음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하며 장(莊)친왕과 여러 왕들에게 태후를 데리고 도성으로 돌아가라 명한 후 자신은 덕주(德州)에 남아 친히 관을 지키며 도성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다른 판본의 야사에서는 건륭제가 배위에서 창기 몇 십 명을 불러와 춤추고 노래 부르며 시연토록 했다고 한다. “너무 음탕하여” 효현황후가 보고는 창기들을 질책하고 홍력에게 조롱하는 말을 건네자 고종이 대노해 황후에게 손과 발로 때리니 푸차 씨가 분한 마음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홍력이 술에서 깬 후 후회 막급하여 효현황후를 융숭하게 상을 치러줬다고 돼 있다.

 

이런 설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효현황후가 물에 빠져 죽었고 도성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은 일치한다. 그러나 황궁의 규칙이 엄격하고 궁실에서 하례나 연회를 거행할 때면 황제 곁에는 시위와 태감들이 즐비했다. 여러 사람들이 두 눈을 빤히 뜨고 보고 있는데 건륭제가 어떻게 황후의 친족과 통정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건륭제가 순시를 나갈 때면 황태후 니오후루(Niohuru, 뉴호록(紐祜祿)) 씨가 동행했고 여러 비빈들이 수행했다. 황후 한 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때 고종은 사순에 접어들었을 때고, 부귀하고 점잖으며 예쁘고 어진 황후가 동행하고 비빈 여럿이 수행하는데 어떻게 스스로를 비하해 창기들을 배로 불러들여 질펀하게 놀 수 있었겠는가. 노모인 황태후가 배에 타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결국 이런 설은 무료한 문인들이 지어낸 기상천외한 허구에 불과하다. 황후의 사인이 질투에서 비롯됐다는 말은 얼토당토않다.

 

사실은 건륭제와 푸차 황후는 애정이 돈독했다. 푸차 씨가 죽자 건륭제는 상당 기간 비통에 빠져 있었다. 푸차 씨를 기억하고 애도해 쓴 건륭제의 도망시는 애절하고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최상의 수준을 나타내는 절창이라 중국 고대의 유명한 도망시들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다.

 

황후 푸차 씨는 대갓집 규수로 아름답고 어질면서도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그녀는 숭경황태후를 기쁘게 해드렸고 지극정성을 다했다. 건륭제와 부부가 돼 조석으로 함께 지냈다. 상냥하고 친절했으며 지성으로 공경했다. 황후는 명문귀족 출신이었으나 검소한 생활을 했다. 일생동안 화려한 의복을 입지 않았고 보석으로 치장하지도 않았다.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유지했다.

 

건륭제가 황위에 오르기 전에 푸차 씨와 결혼했다. 신혼의 부부는 금슬이 좋았고 정이 깊었다. 강희의 눈에는 푸차 씨의 언행과 일거수일투족이 그렇게 매혹적일 수 없었다. 귀여웠다. 완미(完美)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요조숙녀들 중 어느 누가 눈앞의 아가씨보다 나은 사람이 있었을까?

 

푸차 씨의 눈에는 부군이 그렇게 잘 생기고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황태자의 존귀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에게 자상하게 대하고 깍듯이 존중하니 평생을 의지할 수 있었다. 기쁘면서 위안의 마음이 자연스레 생겨났다. 언젠가는 청 왕조의 대통을 이을 것임을 생각하니 푸차 씨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감동과 흥분을 느꼈다. 동시에 두려움과 당혹스러움도 느꼈다.

 

 

혼례를 치른 이듬해(1728) 10월에 푸차 씨는 홍력(弘歷)에게 예쁜 딸을 낳아줬으나 불행하게도 2년도 지나지 않아 요절했다. 옹정(雍正) 8년(1730), 푸차 씨는 아들 영련(永璉)을 낳았다. 영련은 수려한 용모를 지녔고 천부적 재능을 지닌 아이였다. 홍력 부부는 무척 총애했다. 조부인 옹정제도 그를 무척 아꼈다. 성장하면 백성과 왕공들을 맡아 중임을 다할 수 있는 치국의 재목이라 생각했다.옹정제는 홍력에게 장래에 황제가 된 후 영련을 계승자로 만들 것이라고 암시하기도 했다.

 

더욱 기쁜 일은 그 이듬해(1731) 푸차 씨는 또 홍력에게 딸을 낳아줬다. 바로 고륜화경(固倫和敬)공주다. 홍력과 푸차 씨가 활발하고 예쁜 딸에게서 얻은 기쁨에 겨운 마음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735년, 옹정제가 죽자 홍력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유명한 건륭 황제다. 푸차 씨도 황후가 됐다. 그 후 홍력에 대한 진실하고 돈독한 부부의 정 이외에 그녀에게 “천하의 어머니”라는 장중한 책임감이 더해졌다. 푸차 씨는 자신과 비빈들의 일언일행이 유가 규범에 부합돼 건륭제의 치국안민에 도움을 주기 위해 특별히 역대 비빈, 황후 중 가장 현명한 12인의 그림을 내궁에 그려 붙이도록 건륭제에게 부탁했다. 그것이 『궁훈도宫訓圖』다.

 

‘궁훈도’와 그 선양하는 여성 미덕은 : 경인궁 『연길몽란도燕姞夢蘭圖』(비전), 승간궁 『서비직간도徐妃直諫圖』(충직), 종수궁 『허후봉안도許后奉案圖』(존로), 연희궁 『조후중농도曹后重農圖』(근로), 영화궁 『번희간렵도樊姬諫獵圖』(권간), 경양궁 『마후련의도馬后練衣圖』(절검), 영수궁 『반희사련도班姬辭輦圖』(지례), 익곤궁 『소용평시도昭容評詩圖』(독서), 저수궁 『서릉교잠도西陵教蠶圖』(창신), 계상궁 『강후탈잠도姜后脱簪圖』(상부), 장춘궁 『태사회자도太姒誨子圖』(교자), 함복궁 『첩여당웅도婕妤當熊圖』(용감)이다. 건륭제가 친히 찬사(讚辭)를 써 비빈들이 본받을 모범으로 삼았다. 다음은 ‘서릉교잠도西陵教蠶圖’다.

 

 

 

 

 

 

 

 

 

과거, 궁에서는 금사와 은사로 두루주머니를 짜서 황제에게 진상했다. 푸차 씨는 그렇게 하는 것이 사치라 여겨 없애려 했다. 그녀는 만주족이 관외에 있었을 때의 전통을 모방해 새끼사슴 털로 주머니를 짜 건륭에게 주면서 조상이 창업할 때의 고난을 있지 말도록 했다.

 

건륭 9년, 잠단(蠶壇)이 완공되자 황후는 여러 비빈들을 데리고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해 “뽕나무를 구해 누에에게 바쳐 성과가 온 궁에 이롭도록 했다.” 황후가 비빈을 데리고 친잠례를 거행한 것은 옛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봉건 제왕들은 매년 자신이 정무에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나타내기 위해 농사시기에 맞춰 ‘경자례(耕藉禮)’나 ‘친잠례’를 거행하고 황제가 친경(親耕)하면서 자신이 민생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나타냈다. 강희제도 서원(西苑)의 승택원(承澤園) 내에 친히 벼를 경작한 적이 있다. ‘어도(御稻)’라 부르고 실험 전으로 삼았다. 동시에 원 좌우에 잠사(蠶舍)를 지어 누에를 기르고 면을 짜기도 했다.

 

옹정제 윤진(胤禛)은 부친을 본받아 농업 생산을 중히 여겼다. 의식주 민생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황무지에 뽕나무를 심을 것을 제창했다. 그리고 서원 북쪽에 잠사(蠶祠)를 건축하고 잠단, 관상대(觀桑臺), 친잠전(親蠶殿) 등을 세워 후비 등이 친잠례를 거행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건륭황제도 선조의 제도를 존중했다. 황후도 솔선수범하며 몸소 체험하고 힘써 실천했다. 매년 누에를 수확한 후 비빈과 궁인들을 데리고 실을 뽑았다. 관리들에게 명해 염색하고 어의를 짜서 “공급하는 것으로 조정과 제사에 모두 사용했다.”

 

방대한 대청제국에서 황후와 궁인들이 수확한 얼마 되지도 않는 잠사로 모든 옷을 지을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하다. 단지 소박하고 검소한 정신을 강조한 것이었다. 황후가 그처럼 검소하고 사치를 일소하려는 노력은 건륭제에게 충심으로 위안이 됐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