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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제주도민의 도일(渡日) ... 제주 지역 경제에 활력 제공

 

섬 아가씨가 파라솔을 지니기 시작했다. 또 겨드랑이에 지녔던 바구니가 헨드백으로 변해간다. 면(面)마다 두부집이 생겼다. 조선초신이 고무신으로 바뀌었다. 이 무슨 변화냐고 섬의 고로(古老)들은 말한다. 정말 대단한 변화이다(마스다 이치지, 1934).

 

재일 제주인의 일본으로의 이주(移住)는 1945년 해방 이전과 1945년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1945년 해방 이전 일본 노동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1910년에서 1939년에 이르는 시기와 일본이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징용과 징병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동원시켰던1940년에서 1945년 해방까지이다.

 

1945년 해방 이후는 ‘밀항(密航)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해방 이후 1959년 북송사업이 시작되기까지의 밀항 도입기와 1960~70년대의 밀항 절정기,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 불법 체류하며 취업했던 밀항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해방 이전 제주도민 도일(渡日), 즉 일본으로의 이주는 일본 내 노동력 부족과 일본과의 직항로 개설로 인한 이주비용 하락 등으로 당시 제주도 전체인구의 1/4 규모의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 졌다.

 

해방 이전 일본으로의 이주역사를 4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제1기(1907~1913)는 자발적 출가기로 제주도민의 도일 시작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북구주(北九州) 서북중북 및 북서국 지방의 어선이 제주도 어장에 출어하던 시기이다.

 

200여 년 간 ‘출륙금지’(出陸禁止)로 인해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어 왔던 제주도민들은 이 시기 출현한 일본 통어선과 일본의 어로기술에 자극 받았다. 일부 제주도 어업 종사자들은 각종 일본 통어선에 편승하여 일본의 어업 기술 습득을 목적으로 어로 견습을 다녀오기 시작했는데 당시 100명 정도 일본을 다녀왔다.

 

제2기(1914~1922)는 유발적 도일기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 공업이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면서 일본 내부의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이 노동력 부족을 한반도에서 보충하려 했던 시기이다.

 

처음 대판 방적공장에서 제주도내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광고를 내자, 이에 제주도민들이 응모하여 오사카로 건너갔던 시기이다. 또한 1919년 판신 공업지대로 노동자 모집 광고가 났는데 이 구직광고를 보고 여기에 응모하여 제주도민의 도일이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아울러 복강현 안수군 신입촌(福岡縣 鞍手郡 新入村)의 미쓰비시탄광 광부모집을 위한 내도(來島)도 있었다.

 

제3기(1923~1933)는 직공 모집을 위해 일본인들이 계속적으로 내도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2기와 달리 일본경제가 불황 국면에 처했던 상황이었으므로 각 기업마다 생산 원가 절감을 목적으로 저임금 노동자를 선호하던 때였다. 이 시기부터 제주-대판 간 직항로가 개통되어 도일에 드는 시간, 운임 모두 대폭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제주도민들은 1922년 아마가사키기선회사의 제주-대판 간 직항로 개통과 1923년 조선우선(朝鮮郵船)의 제주-대판간 정기항로 개설로 1923년 1만4278명이 일본으로 진출하였다. 계속하여 1925년 도항자 1만5906명 귀환자 9646명, 1927년 도항자 1만9204명 귀환자 1만6863명으로 증가되었다.

 

1929년에는 동아통항조합이 창립되어 도내 11개 기항지로부터 오사카까지 균일 요금이 식사비까지 포함해서 3엔까지 하락하는 등 수송 경쟁에 돌입하였다. 이 시기에는 도일을 원하는 제주도민 누구나 3엔 정도의 현금만 있으면 용이하게 승선 후 2~3일 목적지인 일본에 상륙하여 이미 그곳에 정착한 선배, 친지, 마을 이웃 혹은 마을공제회의 마중과 소개로 일본에서의 취직과 정착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공제조합(共濟組合)은 행정기관(行政機關)이 아닌데 행정관청(行政官廳)에서 관리(管理)하는 것 가티 보이며 또한 대판(大阪)으로 가는 출가(出稼)로동자(勞動者)의 자유(自由)를 넘우도 구속(拘束)하고 잇스니 전도민(全島民)에 대(對)한 이익점(利益點)이 어데에 잇는지 모르겟습니다(동아일보, 1931.01.28).

 

마지막으로 1934년 이후를 제4기라고 한다. 1933년 도항자 2만9208명 귀항자 1만8062명 1934년 5만명인데, 이는 이 당시 제주도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한다.

 

이처럼 제주도민들의 일본으로의 이주가 폭증하게 되고 일본 경제의 불황이 지속되게 되자 일본정부는 ‘도항자 억제정책’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1933년 1월부터 1934년 4월까지 제주도민 도항출원자 12만702명 가운데 70% 정도가 일본으로의 도항이 금지 되었다.

 

도일 출가자들의 출신 지역을 살펴보면, 제주 성내의 중심구, 한림 중심구, 서귀포 중심구 등이 3개 핵심지역이고 희소지역은 표선 중심구이다. 제주읍 서부 대정, 중면, 좌면, 우면 동반부인 서중, 동중, 정의, 구좌, 신좌 및 제주읍 동부는 적다.

 

제주 성내 중심구는 일도, 이도, 삼도, 용담, 도두, 영평, 노형 등 여러 마을이다. 이 마을들은 각각 500~900명이 출가자를 내어, 출가자가 마을 전체 인구의 50~60% 이상인 지역이다(연동, 연평리는 72%). 성내는 1919년 대판 종연(鍾淵)방적공장으로부터의 직공 모집 권유원이 최초로 왔던 지역이다.

 

한림 중심구는 이주민의 제2의 집단구로 북서부의 구우면, 한림은 핵심 지역이다. 각리 마다 200~300명씩 출가(出稼)하였고, 출가비율이 21~30%이다. 이 지역은 성내와 근접해 있고 환상 도로의 제1기 개통과 최초의 승합자동차 운행지역이며,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을 비롯하여 제빙공장 등이 생겨나면서 부근 주민에게 도일 경험에 대한 자료를 제공받았던 지역이다.

 

서귀포 중심구는 행정 구역상 우면(右面)에 속하는 지역으로 각리마다 100~300명이 출가하였다. 그 중 법환리는 330명, 하효리는 200명으로 가장 많다. 이 지역은 서귀항이 있으며 일본 집단 이주어촌이 생겨난 지역으로 제주성내 다음으로 규모가 큰 일본인 집단 거주지역이다. 따라서 일본내 사정의 청취에 용이하며 직․간접으로 일본으로의 출가를 자극하는 요소가 많았다.

 

표선 중심구는 섬의 남동부를 차지하는 출가 희소지역으로 행정상으로는 동중면(東中面) 및 정의(旌義) 북동부를 제외한 지역이다. 동중면은 중간지대로 성읍(城邑)이 70명이고, 타 지역은 대부분 50명 이하이다.

 

이 지역은 여름에 남동풍이 강하여 제주-대판 항로의 개항 후에도 기항이 안 될 때가 많았으며 일본에서 돌아올 때 북안을 서회하여 최초의 상륙지이기 때문에 오사카와 가장 근거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회선 관계상 가장 멀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한편 도일한 제주도민들의 일본에서의 직업을 살펴보면, 농업이 0.5%(244명), 어업이 1.3%(687명), 상업 6%이며 공업 66%(공장노동자)로 절대 우위를 차지했다.

 

남자 직공 중에는 고무공이 4208명, 철공이 3794명, 유리공이 1877명, 법랑공(琺瑯工)이 1671명 순이다. 여자는 방적공이 5375명, 고무공이 1756명, 미싱공이 재봉공 1183명, 유리공이 1050명, 성냥공이 945명 순이다.

 

이처럼 제주도민 직업 중 방적공이 많았던 것은 제주도민의 출가가 방적회사 방적공 모집에 시초를 두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출가 노동자 중 농업노동자가 적은 것은 제주도가 원래 농업지역임으로 출가시기와 농번기가 일치하여 농업을 목적으로 한 도일(渡日)이 적었으며 농업의 보수가 다른 직종에 비해 적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도민들은 열심히 일해 번 돈을 모두 고향에 송금했다. 1926년 우편국을 통해 도내 송금한 송금액은 77만4784엔이며, 1928년에는 128만7140엔이다. 또한 1932년에는 68만5155엔, 1933년 85만7000엔이다(당시 엔화와 원화의 교환비율은 1:1).

 

이외에 도일 제주도민들이 귀향 시 직접 소지하고 온 금액까지 합하면 제주도민들이 일본에서 벌어들인 소득은 훨씬 많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출가해녀들이 벌어들인 소득과 함께 당시 지역 경제에 엄청난 활력을 가져 다 주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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