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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국민당이 말 위에서 천하를 잃자 중국의 역사는 1949년 총부리에 의해 새로운 장을 쓰게 된다. 남경대학 역사학과 교수 고화(高華)는 국민당의 실패는 “역사의 합리적 작용”에 의한 것이고 가장 중요한 원인이 군사상 실패에 있다고 강조했다. ‘당국(黨國)’의 중심이 돼 당과 국가, 군대를 한 개인이 통솔했는데 장개석의 군사상 실패가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동방조보(東方早報)』와 고화 교수의 대담이다.

 

동방조보(東方早報) : 국민당의 실패는 큰 제목이다. 정권이 총부리에서 나온다면 결국 총부리를 잃은 것이 되는 게 아닌가?

 

고화 : 그렇다. 동방 여러 나라의 정권 교체는 총부리가 결정했다. 물론 총부리의 뒷면에는 정치 등의 요인이 있기는 하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실패한 원인에 대해 가장 전면적이고 유행하는 답은 : 국민당의 실패는 역시 “역사의 합리적 작용”에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이며 문화, 사상, 그리고 교육 요소 등 여러 방면이 상호 작용하면서 국민당의 대륙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런 설명은 많은 증거들이 실재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군사 방면에 있다.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더라도 군사상 실패가 가장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다. 다른 원인은 파생된 것이다. 결국 군사상 실패가 첫째 원인이다.

 

1949년 3월 5일, 모택동(毛澤東)은 서백파(西柏坡)에서 거행된 중국 7차 이중(二中)전회에서 말했다. “인민공화국은 바로 인민해방군이다. 장개석의 망국은 결국 군대가 망한 것이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조보 : 중일전쟁 후 국민당의 군사력은 표면상으로만 봐도 절대적인 우세를 보였다.

 

고화 : 중일전쟁이 끝난 후 국민당 정권이 중공에게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다. 실재 세력으로만 봐도 차이가 현격했다. 국민당이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1945년 말, 국군(國軍, 국민당 군대)의 수는 450만(정규군 200만 포함)이었지만 공산당 군대는 127만(야전군 61만 포함)이었을 뿐이었다. 무기와 장비 방면에서 국군은 대부분 미국산이었고 일본과 위군[僞軍, 괴뢰 정부의 군대, 중국의 항일 전쟁 기간에 일제(日帝)의 괴뢰 정권이 조직한 군대를 가리킴]의 무기를 접수했기 때문에 중공보다 확실히 우세했다. 항위회(航委會) 주임 주지유(周至柔)의 보고에 따르면, 국군은 비행기 344대를 보유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해군 군함도 240여 척이나 있었다.

 

외국 원조 방면에서 보면, 소련이 동북에서 공산당에게 적지 않은 원조를 했지만 미국이 장개석에게 원조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그랬기 때문에 장개석은 공산당을 너무 쉽게 봤다.

 

1945년 9월 23일, 장개석은 “장강 이남의 주요 도시에서 투항 받으면 대체적으로 끝난다. 농해철로(隴海鐵路, 연운강에서 감숙성 란주까지 운행되는 철도)도 이미 거반이 접수됐다. 이미 공비(共匪)의 우환을 거반 없앴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중공의 역량은 장강 이북에 집중돼 있었고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국민당 중앙 선전부장 팽학패(澎學沛)는 중공은 그저 “아무런 훈련도 받지 못한 일반 백성”이라고 말하기도 있다.

 

1946년 5월, ‘사평전역[四平戰役, 동북지방 길림성(吉林省) 사평시(四平市)에서 벌어졌던 도시 방어 전투]'에서 국민당이 승리를 거두자 장개석은 더욱더 공산당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당원들에게 “중공은 본래 일부분 이외에는 오합지졸이다. 이번 전투를 통해 세력이 와해될 것이 분명하다.” “중공이 그래도 굴복하지 않으면 일 년 내에 평정할 수 있다”라고 했다.

 

6월 17일, 장개석은 또 “공산당의 전술은 강서(江西)에 있던 시기와 다름없다. 어떤 발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동북지방에서 일본의 무기를 적지 않게 얻었지만 운용할 줄을 모른다.” “우리에게는 공군이 있고 해군이 있다. 그리고 중무기와 특과병이 있다.” “융통성 있게 잘 맞물려 운용하면……분명 속전속결로 간악한 비적들을 마지막까지 소멸시킬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택동도 중공이 그렇게 빨리 국민당에게 승리를 거두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모택동은 1944년 12월 20일에 “이번 항전, 우리는 반드시 중국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얘기하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당내 고위급들에게 자신의 희망을 말한 것일 뿐 실현성이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몇 년 후면 모택동은 승리를 거둘 것이고 장개석을 패퇴시킬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전에는 많은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을 패퇴시킬 것이라 믿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조보 : 국민당은 어쩌면 너무 적을 경시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고화 : 지금 보면, 1945~1946년의 국민당의 교만은 이치에 맞지 않는 허장성세였다. 8년 항전을 통해 공산당은 많은 교훈을 얻었다. 실력도 옛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국민당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항일전쟁 이후에는 쌍방이 대규모 교전을 해 본 적이 없었다. 1934년 ‘강서초공(江西剿共)’에서 국민당이 성공을 거둔 경험도 국군 내부의 중고급 장교들로 하여금 적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사실, 국민당이 역사적으로 거둔 몇 차례 성공은 특수한 배경에서였다. 1934년에 홍군(紅軍)을 서쪽으로 몰아붙이게 된 것도 국군이 절대적 우세를 점했기 때문이고 국민당이 상승세를 타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항일전쟁 시기 국군은 일본군에 많은 승리를 거뒀지만 그것도 민족주의가 국군의 항일투지를 일깨웠기 때문이었다. 1946년 봄, 국민당은 동북지방에서 항일전쟁 승리 후 전투 경험이 많은 백숭희(白崇禧)의 전략으로 인해 임표(林彪)를 사평에서 패퇴시키고 하얼빈까지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47년 이후 국민당은 공산당을 패퇴시키지 못했다. 장개석은 내외 갈등으로 인해 세력이 약해졌다. 김충급(金冲及)이 말한 것처럼 그해 중국은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국민당은 강자에서 약자로 변했다. 당시 절대 다수의 중국인들이 몰랐을 뿐이었다.

 

조보 : 국군이 어떻게 강자에서 약자로 변했나요?

 

고화 : 그것은 팔로군(八路軍)이 정확한 군사 전략 방침을 세웠고 빠른 속도로 대부대전술(Grand Tactics) 방식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사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의 작전 방식은 대부분 유격전이었다. 적지 않은 고급 장교들이 기동전(機動戰)조차 운용하지 못했다. 국민당과의 전쟁에 적응하기 위해 해방군은 전법을 신속하게 변화시켜 실행했다. 만의(萬毅)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1946년 초 중앙군 작전을 시작할 때만해도 기동전을 어떻게 운용할지 몰랐다고 했다. 그런데 동북지방에서 몇 차례 전투를 치른 후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신속하게 대부대 전략을 파악하고 정규화 됐으며 요새 공격전 전법을 구사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군사 전략에 있어 해방군은 국군의 전투력을 갖춘 부대를 소멸시키는 것을 최고의 원칙으로 삼았다. 한 도시, 한 지역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대대적으로 전진하고 대대적으로 후퇴했다. 국내와 국제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토지개혁을 통해 해방군은 충분한 병사의 공급원을 확보했다. 또 투항한 위군(僞軍, 괴뢰정부 군대)을 받아들여 병력을 확충했다. 황극성(黃克誠)의 말에 따르면, 몇 개 월 기간에 동북지방의 10만 부대가 30만여 명으로 늘었다고 했다. 그중 대부분이 위군 출신이었다.

 

용인술에 있어 공산당은 교조주의(敎條主義)를 버렸다. 필요하기만 하면 받아들이고 나중에 개조하면 됐다. 이에 비해 국민당의 진성(陳誠)은 너무 현실에 맞지 않았다. 그는 동북지방에서 위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민족정기’에 타격을 입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동시에, 사상 방면에 있어 중공과 국민당은 “천하를 손안에 둔다”는 목표의식은 명확했지만 조직에 있어 팔로군(해방군)은 지휘를 통일시켰다. 모택동과 중앙군사위원회의 배정에 따랐다. 당, 정, 군 모두 군사화를 이루었다. 가볍게 무장해 전장에 나섰다. 공산당 군대는 임금이 필요 없었다. 그저 먹을 수 있고 입을 수만 있으면 됐다.

 

반면 국군은 그렇지 않았다. 장개석에게는 절대적 권위가 없었다. 명령을 내리면 집행하지 않았고 금지령이 떨어지면 오히려 금지한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저질렀다. 국민당 정부는 전투를 진행하는데 거액의 급여를 지급해야 했다. 보급품도 담당해야 했다.

 

국민당은 단기간 내에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따라서 극심한 통화 팽창이 조성됐다. 그럼에도 장개석은 주의하지 않았다. 단기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었다.

 

공산당 간부는 사유 재산이 없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장개석은 1949년 6월 8일에 쓴 일기에서 “적들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고 썼다. 중공의 장점을 7개 항목으로 나열했는데 “간부들에게 사유 재산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중공의 첫 번째 장점으로 꼽고 있다.

 

 

조보 : 국민당의 군사 동원 능력은 어떤가?

 

고화 : 대륙에 있을 때 장개석은 효율적인 군정 기구를 끝내 만들지 못했다. 여영시(余英時)의 말을 빌면, 장개석은 “효과 없는 독재였다.” 내전이 발발한 이후 국민당은 거국일치의 군사동원체제를 세우지 못했다. ‘총체전(總體戰)’은 구호에 불과했다. 심지어 구호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국민당은 국민들에게 “반란을 평정한다”는 명분에 대해 이해시킬 수 없었다. 국민당 정부가 전국에 “반란을 평정하는 시기에 진입했다”고 선포한 시기에 상해, 남경, 북경, 무한, 광주 등 대도시는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국민들은 전혀 비상시국에 돌입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1949년 8월 24일, 장개석은 중경(重慶)으로 날아가 작전을 지휘했다. 당시 중경은 위급한 상황이었다. 장개석을 수행했던 기밀담당 비서관 주굉도(周宏濤)는 현지 국민들이 “표면적으로는 정상적으로 일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고, 제2의 수도였을 시기와 “큰 변화가 없었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조보 : 국군과 국민들과의 관계는 어땠는가?

 

고화 : 그것은 시기별로 나눠서 봐야 한다. 중일전쟁 시기, 국민정부는 성도(成都) 근교에 미군의 ‘공중 요새(Air Fortress)’를 위해 9곳에 비행장을 만들었다. 45만 군민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스스로 건량을 마련해 어깨에 메고 손으로 옮기면서 가장 원시적인 노동력으로 몇 개 월 걸리지 않고 비행장을 완성했다. 그런 감동적인 장면을 보면서 어느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는가? 그 당시, 정부는 저층 무산계급에게 관심도 없었고 보살핌도 없었다. 모두 ‘항전 제일’로 이해했다. 그러나 내전이 발발한 후 상황이 달라졌다. 백성은 전쟁을 원치 않았다. 국민당은 근거지 쟁탈에 온힘을 쏟았다. 반면 공산당은 전면에 나서 토지개혁으로 농민의 지지를 얻었다. 국민당은 중공의 토지개혁을 반대하면서 『수정 토지법 초안』과 같은 적지 않은 조령을 제정했다. 그러나 형식만 갖춰져 있고 내용은 없는 글에 불과했다. 토지개혁은 국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국민당 문건조차도 많은 농민들이 “국군은 지주를 대신해 전쟁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1946년 12월 21일, 지정서(地政署) 서장 정진우(鄭震宇)는 행정원에 보고하며 직설적으로 밝혔다. “공산당 정책에 따른 감세와 분전(分田) 운동은 심히 농민의 요구와 부합됩니다. ……광범위하게 농민들에게 호소하면서 마음을 움직여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다.”

 

대만 작가 정정균(王鼎鈞)의 회고에 따르면, 산동 전투에서 국군 장교는 일반 백성들이 공산당 군대에 몰래 기밀을 누설하고 있음을 알고 무척 당황했다고 했다. 어떤 장교는 백성들에 대해 격분하여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고 했다. 이 상황이 바로 당시의 실제적이 묘사다.

 

1949년 10월 19일, 장개석은 일기에서 금후 군대를 강화시키는데 누구를 위해 전쟁을 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서 “지권균등, 경자유전, 민생주의 실현을 위해 전쟁해야한다.” “군민합일을 실행해 군대는 진정으로 인민을 위한 군대가 돼야 하고 무력은 인민을 위한 무력이 돼야 한다”고 쓰고 있다.

 

장개석이 이러한 각성은 그저 안정된 대만에서나 유익했다. 대륙의 역사는 이미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에게 실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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