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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2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20여 년 전 홍콩과 대륙 합작품인 무협영화 ‘목면가사(木棉袈裟)’가 개봉되자 대륙에서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한바탕 흥행이 끝나자 사람들은 역사상 진짜 목면가사라는 보물이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영화처럼 불문제자 사이에 목면가사를 쟁탈하려고 목숨을 걸고 추살한 사실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목면가사는 최후에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가? 불문과 세속이 똑 같다는 말인가? 창상의 풍우 속에서 감춰졌던 신비의 면사는 벗겨져 세상에 알려지게 됐지만, 영화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 속 어떤 영상을 뽑아내 엮어낸 것일 따름이다.

 

목면가사는 그저 달마조사(達摩祖師)만 전해져 내려온 보물일 수는 없다.

 

557년, 남조(南朝) 양무제(梁武帝) 시기 천축(天竺) 선종(禪宗) 제28대 보제달마(菩提達摩)가 인도양을 통하여 말라카해협을 넘어 중국에 건너가 선종(禪宗)을 전파하였다. 보제달마는 당시 가사를 가지고 갔다. 이것이 대대로 선종 전법의 신물(信物)이 되었다. 후세에 불가의 제자들이 성물(聖物)로 여기는 ‘목면가사’다.

 

사전적 의미로 다시 뒤적여보자. ‘목면가사’는 원래 석가모니의 ‘금루가사(金縷袈裟)’였다. 어느 날 석가모니는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다 염화시중(拈花示衆)하였다. 그때 대중은 잠자코 있었는데 오직 가섭존자(迦葉尊者)만 미소를 지었다. 세존께서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한 덕)이 있다. 열반묘심(涅槃妙心, 번뇌와 미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 생멸계를 떠난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를 깨닫는 마음)을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教外别傳)하여 대가섭에게 부촉한다”라고 하였다. 가섭존자는 석가모니에게 인정받았고 석가모니는 금루가사를 증거로 가섭존자에게 넘겨주었다. 이 가사가 후대 불문제자들이 부복해 경배하는 선종의 신의(信衣)인 목면가사다. 목면가사는 보제달마에게 전해지는데 이미 제28대가 되었다. 남북조시기 달마는 중국으로 불교를 전파하러 갔고 불교의 성물인 목면가사도 함께 중국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후 달마조사 및 그 계승인에게 전승되는 성물이 되었다.

 

그렇게 달마가 널리 법을 전하면서 선종은 중국 본토의 유교, 도교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당나라 때 무측천(武則天)이 불교를 숭상하기 시작하면서 특히 사대부의 입맛에 맞는 종교 문파로 성장하게 된다. 진일보 세속화가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당나라 때는 ‘선광시대(禪狂時代)’라 할만하다. 선종의 영향력이 막대해지면서 목면가사의 가치도 높아졌다. 그야말로 선종의 지고무상의 성물이 되었다. 그것을 얻는 자가 선종의 정통 계승자가 되었던 것이다.

 

당대에 선종은 5조 홍인(弘忍)에게 이어졌는데 문하제자가 일천을 넘었다. 홍인이 노쇠해지자 목면가사를 받을 계승자를 선택해 선종을 이어가도록 할 생각을 하였다.

 

많은 제자 중 선종을 전수받을 만한 능력을 가진 제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렇지만 홍인은 10대 제자 중에서 선택하려하였다. 계승의 범위를 축소시킨 것이다.

 

그러나 홍인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목면가사를 전수하는데 피를 봐야 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그렇게 바로 현대 무협 영화 ‘목면가사’에서 묘사된 승려들 사이에 살계가 벌어졌다는 소재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홍인은 10대 제자들을 불러 모아 게송(偈頌)을 읊게 하고 그것으로 후계자를 선택하겠다고 하였다. 다른 9명 모두 신수(神秀)를 추숭하였다. 그래서 신수는 게송 한다.

 

身是菩提树(신시보제수) 몸은 보리수(깨달음의 나무)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태) 마음은 명경대라.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
莫使有塵埃(막사유진애) 티끌 먼지 묻지 않게 하여라.

 

홍인이 보고 난 후 신수에게 말했다. “네가 이 게송을 지은 것을 보니 문 앞까지는 왔지만 문안으로 들어서지 못하였구나. 돌아가서 되돌아보고 다시 지어 오너라. 문안을 들어서면 전법의(傳法衣)를 네게 주겠노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수가 수일 동안 고민했으나 새로운 게송을 짓지 못했다.

 

마침 그때 주방의 일을 돕는 혜능(慧能)이라는 어린 승려가 있었다. 글을 알지 못했지만 남달리 총명하였다. 홍인법사의 강경을 들으면서 마음속에 새겨두고 있었다. 혜능이 신수가 새로운 게송을 짓지 못하는 것을 보고 글을 쓸 줄 아는 사형에게 자신의 게송을 기록하게 하였다.

 

心是菩提樹(심시보제수) 마음은 보리수요
身爲明鏡臺(신위명경대) 몸은 명경대라.
明鏡本淸淨(명경본청정) 명경은 본래 청정한데
何處染塵埃(하처염진애)? 어디 티끌 먼지 묻겠는가?

 

라고 읊었다고 한다. 다른 판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읊었다하기도 한다.

 

普提本無樹(보제본무수)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거울에도 또한 대가 없노라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본래 한물건도 없거니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리.

 

이 게송을 본 홍인은 너무 기뻤다. 그리고 자신이 원래 규정하였던 계승자를 선택하는 표준을 바꾸고는 혜능에게 전수하려 마음먹고 비밀리에 혜능에게 『금강경』을 설파하였다. 그리고 어느 수준에 이르자 목면가사를 혜능에게 전수하는 동시에 숭산 소림사를 떠나도록 하였다.

 

혜능은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가사를 가지고 혼자 몰래 영남(嶺南) 일대로 도피한다. 이름을 숨기고 속세를 피해 10여 년을 지낸다. 목면가사를 뺏으려는 다른 문파의 추적을 피해 숨어 지냈다.

 

10여 년 동안 혜능을 암중으로 문도를 모집하였다. 자신의 실력이 홍인의 10대 제자와 필적할만하다 싶었을 때에는 홍인은 이미 원적한 상태였다. 그리고 신수는 선종의 6조(북종〔北宗〕이라 한다)가 되어있었다. 목면가사를 뺏기 위한 피의 혈투도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상태였다.

 

 

혜능은 드디어 영남 일대에서 공개적으로 선종의 교의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남종(南宗)이다. 이때부터 선종은 남북 양종으로 분파된다. 교의는 서로 비슷하지만 가사를 둘러 싼 피의 혈투 속에 두 파벌은 적대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그 혈투의 와중에 빠져들지 않은 인물이 한 명 있었으니 홍인의 10대 제자 중의 일인이었던 지선(智詵)이 바로 그다.

 

지선, 속성은 주(周), 608년 사천 자주(資州) 단산(丹山, 현 자양〔資陽〕시 경내) 출신이다. 621년, 13세의 지선은 가족들과 이별하여 장안(長安)으로 건너가 천축(天竺)에서 불경을 가지고 중원으로 돌아온 고승 현장(玄奘, 『서유기西游記』 당승의 원형)을 스승으로 삼아 불경을 공부하였다.

 

지선은 수십 년 동안 고행하여 마침내 풍부한 불경 이론을 갖춘 고승이 되었다. 지선은 사부인 현장을 떠나 숭산 소림사로 간 후 홍인의 문하로 들어갔다. 나중에 신수 등 9명의 사형들이 목면가사 쟁탈에 몰입할 때 그는 홀로 떠난 지 오랜 고향인 자주(資州)로 돌아간 후 덕순사(德純寺)에서 수행하였다. 나중에는 또 연화산(蓮花山)에서 친히 선종 연대사(蓮臺寺)를 창건하였다.

 

지선은 연대사에 의탁하고 나서 그가 평생 동안 배운 불경 교의를 널리 전파하기 시작한다. 오래지 않아 타강(沱江) 유역의 자주는 당시 사천 불교문화의 중심이 된다. 지선은 연대사의 못 연지(蓮池)에 친히 백련(白蓮)을 심었다고 전해온다. 어떤 가뭄에도 연지 속의 물은 가득 찼다고 하고. 새하얀 연꽃은 언제가 밝은 달이 뜰 때면 꽃망울을 터뜨렸다고 한다. 지금은 연지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그러나 연지의 물은 아직까지도 마른 적이 없다.

 

692년, 여황 무측천은 천관랑중(天冠郎中) 장창기(張昌期)를 소주(韶州, 현 광동 소관〔韶關〕시)로 보내 혜능(慧能)에게 도성으로 들어오라 청했다. 혜능은 여황의 의도를 가늠할 수 없어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4년 후 무측천은 다시 한 번 혜능에게 하산하기를 청했으나 혜능은 감히 장안으로 가지 못했다. 그러자 무측천은 사람을 보내 혜능에게 목면가사를 내 놓으라고 하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혜능은 달마조사의 전법 신물인 목면가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697년에 무측천은 또 장창기를 자주에 파견하여 지선을 도성으로 오도록 청했다. 지선은 90세에 가까운 몸을 이끌고 황궁으로 가 불경을 가르치고 선을 논해 주었다. 그렇게 여황에게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오래지 않아 지선은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윤허해주기를 청했다. 여황은 허락하면서 『화엄경』과 미륵불상 등 법물을 하사하는 동시에 혜능선사에게서 뺏어온 목면가사를 지선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 “혜능선사가 오지 않았으니, 이 가사 또한 스님께 하사하오. 고향에서 영원토록 공봉하기 바라오.”

 

지선스님이 목면가사를 가지고 내려가자 자주의 연대사의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702년에 지선법사는 94세의 고령으로 연대사에서 원적한다. 목면가사는 줄곧 연대사에 공봉 되었고. 천여 년이 흘러 20세기 40년대 말까지 연대사에 공봉 됐는데 나중에 토비들이 흥기하게 되니 여러 승려와 신도들이 목면가사를 뺏길까 염려돼 다른 법물들과 함께 자양(資陽)의 동굴에 숨겨뒀다. 그때부터 목면가사의 행방이 묘연해져 버렸다.

 

천여 년을 버텨왔던 연대(蓮臺) 고찰은 오랜 기간 동안 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폐찰이 되었다. 특히 20세기 70년대 후기의 ‘파사구(破四舊)’ 운동이 벌어지면서 선종의 성지는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현재 유적지에는 대웅보전의 36개 주춧돌만이 남겨져있다. 그 위에 부조된 불경 속 인물 조상만이 여전히 생생하게 보존돼 있을 뿐이다. 어떤 풍광을 겪었는지 우리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듯…….

 

 

돈황(敦煌)에서 발견된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 기록을 정리한다 :

 

목면가사는 5조 홍인까지 대대로 전승돼오다 선종 내부의 분열 때문에 목면가사 쟁탈전이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무측천이 혜능의 손에서 목면가사를 뺏어와 황궁에 공봉 하는 동시에 5조 좌하의 10대 제자도 모시고 와 공양하였다. 당시 자주의 지선도 포함되어있었다.

 

무측천은 10대 고승을 내전으로 청해 공양하고 불법을 물으면서 “여러 고승대덕들도 칠정육욕(七情六欲)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다른 고승들은 모두 이해하기 힘들게 현묘한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유독 지선만은 참되게 대답하였다. “사람이 살면 욕(欲)이 있는 것이요 죽으면 욕(欲)이 없는 게지요.” 무슨 뜻인가? 자신이 살아 있으니 역시 욕심이 있다는 말이 아니던가. 무측천은 실제적으로 참된 말을 한 화상이야말로 도를 얻은 진정한 고승이라 생각하였다. 무측천은 크게 기뻐하며 목면가사를 지선에게 하사하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목면가사를 얻게 된 지선은 도성에 있으면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게 될 것을 염려해 연로하다는 이유로 귀향할 수 있도록 청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제자들을 데리고 사천 자주의 덕순사(德純寺, 나중의 영국사〔寧國寺〕)로 내려갔다. 지선은 목면가사를 정전 안에 보관하였다. 그렇다면 덕순사야 말로 목면가사의 마지막 귀착지가 된다.

 

목면가사, 사실일까? 석가모니의 가사가 달마에게까지 전해지고 중국까지 와서 선종의 피의 신물이 됐을까? 선종은 중국화 된 불교라 강조하기는 해야겠고 중국화 됐지만 본래 석가여래의 정통임을 강조하려는……. ‘본래무물(本來無物)’이 아니던가? 속세의 눈일 뿐.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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