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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미션 (6)

영화 ‘미션’은 1754년부터 2년간 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과 남미 과라니 부족 간에 벌어졌던 소위 ‘과라니 전쟁’을 보여준다. 무기라야 작은 짐승 사냥하는 새총 같은 활과 화살밖에 없는 원주민들과 세계 최강 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 간 전쟁은 애당초 성립부터 가능하지 않다. 전쟁이 아니라 그저 학살이었을 뿐이었다. 그 참혹했던 ‘과라니 학살사건’을 ‘과라니 전쟁’으로 명명하는 서양인들은 참으로 용감하기는 하다.

 

 

1750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마드리드 조약’에 의해 수천년간 그 땅의 원주인이었던 과라니족의 운명이 결정된다. 조선의 백성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의 운명이 청나라·일본·러시아·미국이 자기들끼리 멋대로 벌이는 전쟁과 자기들 형편에 따라 체결한 조약으로 결정됐던 역사와 너무나 흡사해서 마음이 아프다. 

 

작게는 우리의 재산과 생명, 크게는 우리의 운명 자체를 결정하는 전쟁과 조약이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의 의사를 묻지도 들어주지도 않는다. 1750년의 마드리드 조약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인인 과라니족의 운명은 누구의 안중에도 없다.

 

남미 대륙에서 영토를 넓히려는 신흥강자 포르투갈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스페인이 충돌한다. 이들에게 과라니족이란 존재는 그저 그 땅에 나고 자라는 나무나 서식하는 짐승에 불과하다.

 

과라니족들에게 단 한줄기 희망이 있었다면 그래도 그들을 인간으로 대하는 제수이트 교단의 신부들뿐이었다. 제수이트 선교단을 이끄는 가브리엘 신부는 과라니족들을 구원하고자 교황청에 탄원하고 교황청은 현지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추기경을 파견한다. 

 

그러나 결국 과라니족은 교황청에 의해서도 버림받는다. 교황청의 관심사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의 구원’보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는 거대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우선 교회의 권위와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교황은 끝까지 ‘가난한 자들의 평화와 천국’을 고수하다간 교황청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복잡한 방정식을 동원할 필요도 없이 지극히 단순한 계산이면 답이 나온다. 교회를 지탱해주는 재정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과 귀족들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가난한 자들의 천국’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결국 교황청의 묵인 아래 대포를 앞세운 스페인과 포르투갈 연합군이 과라니족 부락을 초토화해버린다. ‘가난한 자들의 천국’을 위해 끝까지 투쟁한 것은 제수이트 교단의 결정에 불복종한 가브리엘 신부와 존 사제, 그리고 노예사냥꾼이었던 스페인의 이단아 멘도사뿐이었다. 가브리엘 신부와 존 사제가 그 학살 현장에서 요행히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아마도 제수이트 교단과 교황청의 종교재판에 회부돼 사형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의 벽 앞에서 ‘가난한 자들의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버리고 과라니족 학살을 방관한 추기경 알타미라노는 착잡하다. 교황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예수회의 설립자였던 성 이나시오(Ignatius)가 설파한 ‘친절(kindness)’이라는 말씀을 망연히 떠올린다. 

 

성 이나시오는 친절을 진정한 종교인의 윤리덕목으로 꼽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인간다움이기도 하다. 친절이란 누군가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지만 어떠한 보상이나 대가도 없이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사람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다. 니체 역시 친절과 사랑을 세상의 아픔을 치료하는 가장 귀한 물질이라고 정의한다. 

 

친절(親切)이라는 한자의 의미 자체도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을 모두 끊어내어 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친절이야말로 진정한 선(善)이다. 국제 정세에서 ‘가난한 자들의 천국’을 옹호하고 지켜줄 세력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라 안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흔히들 한 나라엔 4개의 기둥과 같은 ‘파워 집단’이 있다고 한다. 정치권력, 경제권력, 사회권력, 문화권력의 엘리트 집단들이다. 이 집단의 엘리트들 모두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요란스럽게 쏟아낸다. 

 

그러나 결국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성 이나시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판단을 빌리자면 결코 ‘친절’하지 못한 도움일 뿐이다. 이런 도움들은 니체가 간절하게 원했던 세상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물질이 될 수 없다.

 

영화 ‘미션’에서 친절했던 인물들은 가브리엘 신부와 존 사제, 그리고 한때는 노예사냥꾼이었던 멘도사 세사람뿐이었다. 친절을 강조한 성 이나시오가 창립했던 제수이트 교단 신부 가브리엘과 존은 혹시 성 이나시오의 가르침에 따라 과라니족에게 친절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수이트 교단의 가르침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과라니족에게 친절했던 멘도사야말로 진정으로 ‘친절한 인간’이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내미는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다. 하다못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대부업체의 도움의 손길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대가와 보상도 바라지 않는 ‘친절한 도움’은 참으로 귀(貴)하다. 그래서 더욱 귀(貴)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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