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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人]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김상수 생태문화해설사
“조상들의 땅 거문오름을 가꾸기 위해 오늘의 내가 있다”

 

거문오름에서 동쪽으로 넓게 탁 트인 오름 군락들을 보면서 제주의 광활함을 느끼며 자랐다. 서쪽으로 한라산과 그 자락으로 뻗은 오름을 보면서 내 고장 제주가 정말 아름답다는 것을 보고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고향은 여전히 세상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산골 촌구석이었다. 고향을 바깥세상에 알려야했다. 고향 발전도 필요했다.

 

세계자연유산지구가 된 거문오름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에 세계자연유산센터를 유치했다. 세계적 유산을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 ‘선흘2리’는 제주도민은 물론 우리나라 국민, 세계인이 아는 마을이 됐다. 이제 남은 것은 세계인의 유산을 잘 지키고 가꿔 후대에 남기는 것이다. 또 선흘2리를 ‘환경마을’로 가꾸는 일이다.

 

오늘도 신발끈을 메고 거문오름을 찾는 탐방객을 안내하는 생태문화해설사 김상수(52)씨.

 

#거문오름은 어린시절 놀이터

 

김 씨는 제주시 조천읍 선흘2리 선인동이 고향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선흘2리 백화동에서 살았다. 백화동은 과거 4.3사건으로 인해 사라진 마을이다. 초등학교까지 40분을 걸어서 다녔을 정도로 선흘2리는 그저 한라산 자락 중산간에 위치한 산골마을에 불과했다.

 

그에게 거문오름은 놀이터였다. 동네 친구들, 선후배들과 함께 박쥐도 잡으러 다녔다. 겨울에는 꿩코(꿩 잡는 덫)도 놨다. 으름열매도 따먹으러 오름을 찾았다. 떼로 덥힌 오름은 말을 방목하기 좋아 말 방목하러 오름도 올랐다. 오름 정상에서는 한라산과 주변 오름이 잘 보였다. 봄에 아지랑이를 보며 무서워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숨골에서 나오는 ‘풍열’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교로 진학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산골 촌놈이 제주시내로 유학(?)을 간 것이다. 고교를 졸업한 그는 오라골프장에서 원예사로 근무했다. 이후 한진그룹의 제동목장에서 골프장 조성사업팀에서 근무를 했다. 하지만 골프장은 무산이 됐고 그가 할 일은 없었다.

 

#11년 만에 귀향…잇따른 사업실패

 

1991년. 그는 31세가 돼서야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생활터전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농촌생활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제주시를 오가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농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유자농장을 했지만 수확할 때 가격이 폭락했다. 이번에는 단감에 도전했다. 별다른 기술도 없어 지인으로부터 2년간 기술전수를 받았다. 7000평에 달하는 단감은 그래도 소득을 봤다. 키토산재배를 통해 ‘새농민상’도 받았다. 귀향 9년 만에 일궈냈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실패했다. 다른데 한눈파는 사이에 단감농장을 망처 버린 것이다. 결국 폐원했다. 다시 재기한 것은 감귤농사였다. 재기는 쉽지 않았다. 이번엔 품종선택을 잘못했다. 농업은 냉혹했다. 그래도 고향을 떠날 수 없었다. 인생을 고향에서 보내겠다고 굳게 다짐했기 때문이다.

 

#마을이장으로서 세 번째 인생도전

 

2006년 12월. 마을에서 연락이 왔다. 마을총회에 참석하라는 것이다. 새 이장 선출이 안건이었다. 마을총회에 앞서 마을 어르신이나 선배들은 그에게 이장자리를 권유했다. ‘내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일을 하겠냐’며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마을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결국 그는 선흘2리 마을이장이 됐다. 고향에 정착한 지 16년. 47세에 세 번째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우선 마을주민들과 소통을 했다. 3개월을 리사무소에서 보냈다. 찾아오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1년 먹을 커피를 다 먹을 정도였다. 마을 발전도 필요했다. 당시만 해도 산골 촌구석 ‘선흘2리’는 아무도 몰랐다. 공무원조차도 선흘리를 몰랐다. 기분이 몹시 나빴다.

 

우선 선흘리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제주시주민자치박람회 다가오고 있었다. 부스 하나를 얻었지만 뭘 전시해야 할지 몰랐다. 주민들에게 특산물을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저지리가 복분자차를 내놓을 것이라는 말에 도라지차, 더덕주로는 한계가 있었다. 마침 천연염색을 떠올렸다. 애들을 잡으면 부모도 찾아올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도라지주, 더덕주, 오가피주 600개와 천연염색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부스에 시민들이 천연염색한 손수건을 걸고 마른 뒤 가져가게 했다. 준비한 전통주 시음도 했다. 예상대로 대박이었다. 부스도 박람회장 입구여서 행운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을 발전. 김씨는 박람회 직후 터진 거문오름 세계자연유산 등재라는 쾌재를 놓치지 않았다. 그에게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던 거문오름이 마을발전에 큰 기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에게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이었다.

 

 

-거문오름이 세계자연유산이 등재된 뒤 마을주민들이 해설사가 됐다.

 

“이어진 행운이었다. 2007년 6월 어릴 때 놀던 거문오름이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등재되면서 마을주민들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그래서 직접 마을주민이 탐방객을 위해 해설사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저 단순하게 뛰어들었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마을주민들은 거문오름의 지질, 식물, 문화, 역사에 대해 몰랐다. 도에서 세계자연유산 등재신청을 하면서 환경단체에 해설사 양성위탁교육을 실시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이 들어갈 공간은 없었다. 자체적으로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마을에서는 해설사 교육하는데 돈을 들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교육자료를 만들기 위해 강사가 거문오름 답사에 동행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교육에 마을주민을 포함시키지 않으면 현장 교육 시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이후 검토하겠다고 하더니 4~5일 뒤 5명을 교육시켜주겠다고 했다.”

 

-해설사 교육은 어땠나

 

“주민들은 교육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반상회에서 신청하라고 했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리사무장과 나를 포함해 겨우 5명 맞췄다. 신청하는 날 마을 어르신이 ‘나이제한 있느냐’라고 관심을 보이자 ‘상관없다’고 해서 두 분을 포함시켰다. 그렇게 리사무장과 내가 빠지고 5명을 신청했다. 그런데 교육하는 날 교육장에서 내가 빠지면 교육을 안 시키겠다고 했다. 그래서 6명이 교육을 받았다. 그 이유는 몰랐지만 그냥 덩달아 교육을 함께 받았다. 그렇게 1년간 교육을 받았다. 교육은 2008년 6월에 끝났다. 마침 교육이 끝나자 세계자연유산 등재 1주년 기념 거문오름트레킹대회가 열렸다. 바로 해설사로 투입됐다. 해설사들은 대부분 주민위주로 운영이 됐다.”

 

-거문오름 관리는 어떻게 해서 하게 됐나

 

“트레킹 이후 마을에서 관리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인원제한하면서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민원 때문이다. 이미지도 나빠질 것을 우려했다. 도에서는 예산과 인원이 없다며 직접관리가 어렵다고했다. 트레킹위원회도 관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문뜩 '우리가 관리를 안하면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느꼈다. '세계자연유산을 유일하게 마을에서 관리를 하게 된다'는 자부심을 가질필요가 있었다.”

 

-등재 이후 많은 탐방객들이 찾아왔을 텐데

 

“1년 동안 매일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유일하게 오름 등반 규제가 있었다. 사전예약제에 신발 규제와 스틱, 우산 등을 소지하지 못하게 했다. 당연히 민원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너희들 것이냐’, ‘내가 세금 냈는데 왜 못 들어가게 하느냐’ 등 욕도 많이 먹었다. ‘융통성이 없다’고도 했다. 1년을 설득하고 이해시켰다. 1~2년 지나면서 당시 욕했던 사람들이 ‘고생한다. 모범적으로 됐다’고 한다. 그럴 때면 그때 서운한 감정들은 잊어버린다. 그로 인해 산행문화가 많이 변한 것 같다. 사려니오름, 절물오름 등에 대한 통제도 우리가 한 방식을 따라 한다. 도내는 물론 육지부에서도 벤치마킹을 하러 온다. 지리산 둘레길이 만들어지면서 마을에서 관리하는데 그곳 주민들이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견학온다. 자부심을 느낀다.”

 

 

-거문오름에 대해 얼마나 공부했나?

 

“거문오름이 등재되고 나서 거문오름에 대한 이야기를 어머니를 통해 공부했다. 1944년 일본군이 주둔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거문오름에서 농사를 지었었다. 일본군이 들어와서 진지동굴이 구축됐다. 제삿집에 갈 때에는 동네 어르신이나 삼촌들에게 거문오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식물은 고등학교 때 식물연구하시는 선생님이 있어서 같이 한라산을 다니며 공부해 어려움이 없었다. 지질이 어려웠다. 마을주민들도 처음에는 억지로 했지만 지금은 스스로 강의를 찾아다니며 듣는다. 관련서적이 나오면 직접 가서 구해오기도 한다.”

 

-마을 분위기가 많이 변했을 텐데

 

“첫해에는 불만이 많았다. 아침에 새소리에 깨는 어르신이 사람소리에 깬다고 불평을 했다. 조용히 살려고 마을로 들어온 주민들도 불만스러워했다. 어떤 주민들은 마을 안길로 다니지 말라고 신경질적인 반응도 보였다. 그러나 탐방객들이 마을에 경제적 영향을 주면서 달라졌다. 당시 2개 밖에 없었던 식당이 이제는 14개로 늘었다. 주민들보다 탐방객들이 더 많이 이용한다.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고 센터가 유치되면서 관광지도 속속 들어서고 있다. 이제는 선흘리가 관광루트가 됐다. 환경에 대해서도 주민들의 인식이 변했다. 쓰레기를 태우지 않고 분리해서 버리는 것이 생활화 됐다. 마을안길에는 쓰레기를 볼 수 없다. 주민들 의식자체가 눈에 안 보이게 자연스럽게 변했다. 이제는 대규모 개발보다는 자연그대로를 유지하기를 주민들도 바란다. 농로포장도 안 된다고 한다. 주민들은 환경이 우리자산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세계자연유산센터 유치는 어땠나?

 

“개인적으로 한 10개월 정도 고생했다. 한국관광문화원에서 시찰 왔을 때 축구장 같은 천연잔디에 숯불, 불판, 돼지구이, 술만 준비했다. 젊은 사람과 여성들도 많았다. 거친 잔디밭에 앉으려는 것 꺼려했다. ‘다금바리를 사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천연축구장 같은 곳에서 흑돼지 구워먹는 체험은 어디 가서 해볼 수 없는 체험이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더니 하나 둘씩 앉았다. 나중에는 소주 한 박스를 다 먹어 버렸다. 다음날 오전 9시 거문오름 탐방갈 예정이었는데 일어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었다. 그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고 가라’고 했다. ‘세계자연유산센터는 접근성과 토지확보가 좋아야 한다’고 했다. ‘한라산, 만장굴, 성산일출봉을 가까이 갈 수 있어 중심’이라고 했다. 이후 도민공청회에서 거문오름이 적격지라고 했다. 11월이 되니 거문오름하고 돌문화공원으로 압축됐다. 결국 주민기여도에서 결론이 났다. 거문오름은 마을주민이 해설사 역할을 하겠다고 한 것이 주요했다. 전문가 여론조사에서도 우리가 앞서긴 했다.”

 

-유치하는데 힘든 일은 없었나?

 

“유산센터가 확정되고 백화동쪽이 우리 마을에서 가장 바람직하다 생각해서 제안을 했다. 그런데 ‘그 땅 주인한테 이장 돈 먹었다’는 소문이 나 상심이 컸다. 끝내는 현재 지금 자리가 자연유산센터로 정해졌다. ‘세계자연유산에 대형 주차장이 웬 말이냐’고 언론보도도 나오고 해서 힘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트래킹 2년 하는 동안 선흘리가 많이 알려지고 방송에 나오면서 마을 이미지가 상승됐다. 유산센터도 유치해 뿌듯하기도 하다.”

 

-이제 관리는 세계자연유산센터에서 하게 됐다.

 

“세계자연유산센터가 개관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센터라는 게 관공서라서 마을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올 수 있어 소득창출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리는 도에서 하게 된다. 그러나 탐방은 아마 유료로 전환될 것 같다. 돈을 받게 되면 탐방객을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서비스의 질도 좋아져야 한다. 현명하게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꼭 보고 싶은 사람들은 돈을 내고도 보고자 할 것이다.”

 

 

-블랙푸드사업은 무엇인가?

 

“탐방안내소를 만들면서 특산품을 판매했는데 잘 안됐다. 주 생산물이 도라지, 더덕, 통 등인데 생물은 1~2일이 지나면 폐기해야 한다. 1년 내내 판매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블랙푸드사업이다. 농업기술원에 근무하는 지역 선배에게 소득사업으로 자문을 구했는데 거문오름의 ‘검다’(거문·블랙)과 연계해 블랙푸드사업을 착안했다. 검은 농산물을 사용해서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선배가 농촌진흥청으로 발령 나는 바람에 사업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기술원에서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9개 식당과 13농가가 신청을 했다. 검은콩, 흑보리, 흑미, 검은깨 등등. 검은콩을 재배해 식당에서 검은콩국수를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기술원도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레시피 개발과 함께 ‘블랙진미’를 추진하고 있다.”

 

-WCC가 이제 곧 개막한다.

 

“이번 총회에 앞서 ‘2012생태문화해설사’ 교육을 4개월간 받았다. 총회 기간 동안 세계적 환경운동가들이 거문오름을 반드시 찾을 것이다. 우리의 환경의식과 제주의 환경에 대해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특히 지역주민들이 관리하고 보존하는 곳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겠다. 그리고 제주는 환경이 살아있는 곳이라고 말하겠다. 마을회에서도 이미 준비를 마쳤다. 가장 큰 문제가 숙박인데 게스트하우스를 개장하고, 민박집도 준비했다. WCC지역위원회도 결성해 관광코스도 개발했다. 지역관광지와 주민들을 이을 수 있는 수눌음센터도 구성할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지난 1월 이장으로서 임기가 끝났다. 5년간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 거문오름 일부가 할아버지 땅이었는데 큰아버지가 팔고 육지로 나갔다. 조상님들의 땅을 가꾼다는 마음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것 같다. 지금은 해설사로로 마을을 조상의 남긴 유산을 제대로 가꾸고 보존해 후손들에게 남기는데 힘을 쏟을 것이다. 그리고 선흘2리가 ‘환경마을’로 세계인들에게 알리는데 노력하겠다.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고장이지만 내 삶의 터전이자, 내 아이들이 물려받을 터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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