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해녀 [사진=제주대박물관] “말 ᄆᆞᆯ른 돈, 귀 막은 돈, 눈 어두근 돈이여” 말 모르는 돈, 귀 먹은 돈, 눈 어두운 돈. 해녀 물질은 무엇보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이다. 야속하게도 돈은 말할 줄 몰라서인지 불러도 아무 대답 없고, 귀가 안 들리는지 오라 해도 모른 체한다. 그런가 하면, 눈이 어두워서 인지 찾아들 줄도 모른다. 이처럼 제주해녀들이 마음대로 돈이 ‘안 모여짐’을 한탄하던 제주 속담이다. “물에 들 땐 지에집을 일뢈직이 가곡, 돌아올 땐 똥막살이 ᄑᆞᆯ암직이 온다” 물에 들 때에는 기와집을 이룰 듯이 기세 좋게 들어가고, 돌아올 때에는 오막살이라도 팔듯이 기운 없이 온다. 이처럼 의욕만큼 성과를 이루지 못함을 말해주는 제주 속담이다. 해녀들이 큰 전복이나 캘 의욕으로 물질에 뛰어 들지만 결과는 그보다 못할 때를 말한다. “물천은 공것, 친정집보다 낫다” 해산물은 공것(공짜), 친정집보다 낫다. 해산물은 밭농사하고는 다르다. 밭농사는 씨 뿌리고 김
▲ 어머니와 아이가 나란히 땔감을 해서 등짐을 지고 가는 모습. [사진=제주도] 옛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나무꾼이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 한 마리를 나뭇더미 속에 숨겨 구해 주었다. 사슴은 그 보답으로 나무꾼에게 하늘나라 선녀 전용 연못을 알려 주면서 멱 감는 틈을 타 날개옷을 감추라고 사주했다. 각본대로 나무꾼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선녀와 동거해 애 둘 낳고 (잘)살았다. 지역마다 시대마다 변이(變移)되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결말은 그리 좋지 않다. 당연한 처사다. 요즘 제도로 보면 업무 방해, 사기, 절도, 편취, 납치에 강제 결혼까지. 무엇보다 하늘나라 법을 농락하였으니 목숨 부지만 해도 조상님 은덕(恩德)이다. 결국엔 닭이 되어 새벽부터 지붕에 올라가 하늘에 거주하는 사실혼 아내와 자식 둘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꼬끼오’ 하는 계(鷄) 신세가 됐다. 예전 한라산엔 나무가 아주 많았다. 삼림령 이전에는 그 나무를 베어다 집 짓고 덕판배 만들고 테우를 이어 메우기도 했다. 그러려면 목재를 자르고 쪼개고 다듬고 소에 지워 내려와야 한다. 지금이야 좋은 장비들이 많지만 당시는 길도 험하고 도끼나 자귀,
▲ 탕건 탕건노래는 갓 쓰기에 앞서 머리를 감싸던 말총으로 만든 탕건을 결으며 부르던 민요다. 조선시대부터 근래까지 탕건 겯기가 가장 왕성했던 제주에서 전승되었다. 제주에서 화북(禾北), 삼양(三陽) 등 제주시 일대와 신흥(新興) 등 조천읍 지역에 분포되었던 탕건 겯기는 양태, 모자, 망건 겯기와 더불어 제주도 부녀자들의 중요한 가내수공업이었다. 조천(朝天)은 과거에 조천관과 포구가 있어 내륙과의 문물 교류가 왕성했고 원료와 완제품 이출입이 용이했다고 한다. 고정종(高禎鍾)의『제주도편람(濟州島便覽)』에 의하면, “제주도의 공업은 유치한 수준, 단계로 제주도의 자원, 즉 자연환경을 이용한 약간의 자원을 가공하는 수공업 제품들 예를 들면, 죽제품, 조선모자(帽子), 탕건, 양태 등이 주를 이루었고 이외에 주로 자급적 성격을 지닌 약간의 면직물 제품이 존재했다”고 한다. 1929년 조사에 의하면, 제주 도내 양태(凉太) 생산 종사 호수 1만3700호, 1개년 생산 수량 135만개, 생산액 40만5000원, 탕건(宕巾) 생산 종사 호수 128호, 1개년 생산 수량 9300개, 생산액 1만5810원, 망건(網巾) 생
제주 전래 농기구는 농경 과정에 따라 파종구(播種具), 육성구(育成具), 수확구(收穫具), 운반구(運搬具), 탈곡구(脫穀具), 도정구(搗精具), 저장구(貯藏具) 및 기타로 분류한다. 철재 농기구는 파종구나 육성구가 많다. 제주 지역 토양은 자갈이 많고 토심(土深)이 얕다. 그래서 ‘보섭(보습)’이 넓으면 잘 긁어지지 않으므로 제주 농기구는 대체로 뾰족하다. 이처럼 제주에서는 농토를 갈고 경작하는 데 효율적인 농기구로 뾰족하고 가는 연장이 발달하였다. 소를 이용하는 쟁기 역시 보습과 볏이 작아 돌이 많은 땅을 일구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다. 김매고 작물 솎아 주는 육성 농기구로 ‘ᄀᆞᆯ갱이’ 가 있다. ᄀᆞᆯ갱이는 자갈밭용과 점토질인 질왓용 두 종류가 있다. 자갈밭용은 끝이 가느다란 모양으로 돌 틈의 풀 뽑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곡식이나 풀을 베고 나무를 치는 데 사용하였던 낫이 있다. 이를 제주에서는 ‘호미’라 부른다. 이와 함께 개간 용구로 코끼리 이빨형의 쌍따비와 주걱형의 웨(외)따비, 뾰족형의 벤
▲ 도리깨질하는 농민들. [제주도] 어떤 사람 팔재 좋앙 고대광실 높은 집에 팔재 좋게 저마는 요네 팔재 험악 허영 불더위에 요 마당질 허야도 홍아 타작(打作)은 곡식 이삭을 떨어 낟알을 거두는 농사일이다. 바심, 풋바심이라고 한다. 조+바심=조바심=조의 이삭을 떨어서 좁쌀을 만듦. 추수는 감사하나, 타작은 그렇게 마음 졸이는 작업이다. 그러나 걱정은 우리를 힘들게만 할 뿐 어디에도 데려다 주지 못한다. 제주에서는 밭 구석이나 마당에서 도리깨를 이용하여 보리나 조, 콩 등 잡곡을 타작했다 도리깨로 타작하는 곡식이 주로 보리였기 때문에 ‘보리 타작소리’라고 했다. 또한 콩이나 팥도 도리깨로 타작하기 때문에 그냥 ‘타작노래’라 부른다. 아울러 도리깨를 사용하는 일이므로 ‘도리깨질 소리’, 주로 마당에서 타작이 이루어졌음으로 ‘마당질 노래’라고 했다. 욜로(여기서) 요레(여기) 누게나(누가) 앉고 허야도 홍아 설룬(서러운) 정례(貞女) 말이로구나 두드렴시민(두드리다보면) 부서나진다 ᄒᆞᆫ(한) 번
▲ 60년대 해녀 -출처 제주해녀박물관 “어떤 사람은 복도 좋아 앉아 살리. 우리네는 바람이랑 밥으로 먹고 구름으로 똥을 싸고 물결을 집안 삼아, 부모 동생 떼어놓고 오늘도 바다에 든다.” “요 물질하여 소를 살까, 밭을 살까. 한 손에 빗장, 다른 한 손엔 호미 들고 미역, 생전복 따다가 어린 자식 공부시켜 판사 만들려고 힘들어도 바다 위에서 시달리는 불쌍한 이내 몸아. 어느 때면 이내 몸도 좋은 세상 만나서 남들처럼 잘 살 수 있으려나.” 힘든 바다 물질해서 벌어들인 소득으로 소나 밭을 사거나, 자식 교육시켜 판사 만들어 생활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해녀노래다. 노 저어 차귀도나 비양도 등 주변 섬으로 물질 작업 가거나 육지로 출가 물질 가며 불렀다. 테왁 짚고 물에 뛰어들어 ‘갓물질’ 작업 위해 헤엄치며 불렀다고도 한다. 어떤 사름(사람) 복도 좋앙 앚아(앉아) 살리 우리네는 ᄇᆞ름(바람)이랑 밥으로 먹곡 구룸(구름)으로 똥을 싸곡 물절(물결)이랑 집안 삼앙(삼아) 부모 동싕(동생) 떼여 두곡 오Ƴ
▲ 아낙들이 물허벅에 물을 지고 집으로 가고 있다. [제주도] 제주사회는 전통적으로 삼무(三無)사회였다. 거지 없고(乞無) 도둑 없고(盜無) 대문이 없었다(大門無). 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갈래다. 이를 미풍양속으로 보면, 서로 믿고 존중하며 다 아는 사회여서 도둑이 없었다. 그래서 굳이 대문이 필요 없었다. 다만 가축 출입을 통제하고 집주인 출타 상황 알림 기능을 하는 정낭만 있으면 된다. 이를 불편한 진실로 보면, 다들 물질적 삶이 궁핍하여 가져갈 재물과 나눠줄 식량이 없어 도둑과 거지가 없었다. 그래서 대문이 없다. 이 해석은 한때 삼무정신을 계승가치(이념)로 삼아 교육했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경제사 관점에서 잉여(surplus) 부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예전 제주사회는 저생산 사회였기 때문에 축적할 만한 잉여(剩餘)가 부족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 그러면 빈 곳간에서는? 지역마다, 시대마다 빈곤(가난)에 대한 대처가 다르다. 나라야마 부시코(1983 제작, 1999 개봉)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윤리, 도덕, 제도 발생 이전, 본능 특히 성욕과 종족 보존, 야만성만이 존재하던 사
▲ 테우. 테우는 연안에서 자리와 갈치를 낚거나 해초 채취할 때 사용했던 통나무배다. 여러 개 통나무를 엮어 만든 뗏목배로 ‘떼배’, ‘터위’, ‘테’ 등으로 불렸다. 원래 테우는 부력이 뛰어난 구상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제주바다 암반지대에서 비교적 이용이 수월하다. 연안 낚시나 해조류 채취뿐 아니라 가까운 바다로 물질 가는 해녀들의 이동수단으로 사용했다. 80~90년 전 한라산 구상나무 많던 시절 해안마을에서 집집마다 테우를 만들어 이를 미역, 듬북 등 해초를 걷어 옮기는데 이용하거나 그물로 자리돔 잡을 때 이용했다. 지금은 ‘테우 축제’ 같이 전통 어로활동 재현이나 관광객 체험용으로 거듭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호 테우 해변, 쇠소깍 테우 체험. ‘테우 젓는 노래’는 ‘흥셍이 소리’로 선유가(船遊歌)다. 어부들이 자리돔이나 갈치 잡을 때, 해녀 물질 갈 때 노 저으며 부르던 민요다. 테우는 보통 세 사람이 노를 젓는다. 가창 형식은 선후창으로 부르거나 독창으로 부른다. 노랫말에 순풍에 돛 달아 노 젓
▲ 밤바다에 불 밝힌 갈치잡이 배 어느 순간 갈치가 비싸졌다. 은갈치, 먹갈치, 흑갈치, 산갈치, 갈치회, 통갈치 구이, 갈치조림, 갈치속젓. 그래봐야 갈치다. 개인적으로 각재기국은 어찌 어찌 먹겠는데 갈치국은 도저히 못 먹겠다. 갈치국에 들어간 늙은(?)호박은 더 싫다. 갈치는 굽거나 튀겨 먹어야 제 맛이다. 이보다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은 갈치 가운데를 횡으로 갈라 넓게 편 다음 말려서 구워 먹는 거다. 이러면 뼈까지 먹을 수 있다. 은어(銀魚)도 그렇다. 천제연과 베릿내 은어를 몇 십년간 독식하셨던 외할아버지 비법이다. 베릿내 포구 축항 이후 그 은어는 모두 사라졌다. 분당에서의 신혼시절 얘기다. 장손 얼굴 보러 제주에서 올라온 어머니는 산후 부기(浮氣)있는 임산부에 좋다며 갈치호박국을 특별식으로 끓이셨다. 어릴 적부터 호박을 안 먹는 내가 은비늘 둥 둥 뜬 갈치호박국을 먹을 리 없다. 그런데 육지 며느리인 아내는 맛있다며 그 호박국을 다 먹었다. 갈치호박국 먹을 줄 알면 그걸로 제주 ‘사름’ 다 된 거다. 더하여 자리젓도 주저하지 않고 대가리부터 먹는다면 필시 전생에 제주바다에서 나고 자란 섬놈이다.
▲ 통시 [사진=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ᄃᆞᆺ거름을 ‘ᄃᆞᆺ걸름’으로 발음하는 분들이라면 안다.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옛날 말 하는 거 보니 나도 늙긴 늙었구나. 어쩌다 거울보고 ‘큼착’ 했다. 거기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날 쳐다보고 계셨다. ᄃᆞᆺ거름은 예전 제주에서 ‘통시’나 ‘ᄃᆞᆺ통’에서 만들었던 퇴비(堆肥)다. 통시는 변소 겸 돼지우리로 몽고와 동남아시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ᄃᆞᆺ통은 ᄃᆞᆺ, 뒷간 돼지 통, 돼지우리(豚舍)다. 우리는 통시보다 ᄃᆞᆺ통이 더 친숙하다. ᄃᆞᆺ통에 반드시 긴 막대기가 놓여 있었던 걸 기억하는 분들은 더욱 그러실 거다. 통시에서 ᄃᆞᆺ거름을 꺼내 마당에 쌓으면 밑에서 새어 나오던 황토색 물과 그 냄새. ‘
▲ 애기구덕. [사진=제주도] 제주사람들은 머리가 좋다. 어릴 적 구덕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이는 애향심 발로로 근거가 약해 보인다. 그래도 ‘두상은 좋다’라면 얼추 끼워 맞출 수 있다. 아이 키울 때 두상 예뻐지라고 돌려가며 눕히곤 한다. 구덕 흔들면 아직 굳지 않은 아기 머리가 자연스레 둥글게 된다. 구덕에 아기 눕혀 흔들면 아기들이 자게 되는 이유는 뭘까. 미국까지 구덕 공수해 가서 딸 둘 키운 동생 생각처럼, 어지럽고 멀미나 억지로 자는 건 아닌지. 온실 속 화초가 아닌 야생화처럼 아이를 키워야 한다. 제주말로 ‘몽그리멍’ 키워야 한다. 흙도 ‘좁아' 먹어 가면서. 그래서 구덕에 눕혀 익스트림 생존력을 높였나 보다. 구덕에 눕혀 흔든다고 애기들이 다 자는 건 아니다. 일부 ‘시무쟁이’ 궂은 애들은 구덕 ‘흥글’ 때만 잠시 자는 척 하다 멈추면 바로 눈 뜬다. 구덕 흔드는 속도나 리듬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간혹 누워 발로 흔들다가 구덕이 엎어지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한다. 구덕은 원래 수요자의 입장, 즉 아기의 라
▲ 망건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강전향 할머니(중요무형문화재 제66호 망건장 보유자). [사진=뉴시스] 갓 사러 갔다가 망건 산다. 갓 사러 갔는데 갓이 없어 대신 망건을 샀거나, 아니면 가는 도중 마음이 바뀌어 갓 대신 망건 샀거나, 뭘 사러 갔는지 깜박하고 비슷한 거 샀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주머니 사정에 맞춰 망건 샀거나. 나이, 성별, 지역에 따라 다르겠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잠잘 때 제외하고 일상생활에서 늘 망건을 착용했다. 잠자리 들 때서야 상투 풀고 망건 벗어 두었다가 아침에 세수 한 후 다시 동여맸다. 이처럼 몸 가까이 두는 망건을 귀하게 여겼다. 사용하지 않을 땐 둘둘 말아 망건통에 넣어 보관하였다. 망건통 역시 소중하게 여겨 최대한 좋은 재료로 제작하였다. 이때 신분이 높고 낮음이나 부(富)의 정도에 따라 망건통을 나무로 만들거나 그 위에 상어껍질을 비롯한 고급재료로 장식했다(한국민속대백과사전). 망건과 탕건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착용하던 관모(冠帽)이다. 그 당시 관모공예품 대부분은 제주여성들의 손기술과 땀으로 만들어졌다. 망건은 갓 쓰기 위해 상투 틀 때 머리털을 위로 걷어 올리려고 이마에 두르는 띠를 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