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한반도 통치 기반 마련을 위해 토지조사사업과 민적법(民籍法)을 근거로 하여 민적조사(民籍調査)를 실시하였다. 민적조사는 호구의 정확한 파악을 위한 것으로 원래 직업조사와는 무관했지만, 1909년 8월 총독부 경무국장은 민적조사를 이용하여 ‘민적부(民籍簿)’에 호주(戶主)의 직업을 표기해 두는 훈령(訓令)을 내렸다. “민적조사(民籍調査)가 다 완료된 이후에는 경찰관서에 민적부를 갖추어 지방에서는 면장(面長)이 신분상의 이동(異動)에 관한 인민의 신고를 관리하여 매달 그것을 관할 경찰서에 보고토록 함으로써 그 추보정정(追補訂定)을 하고 5개년 마다 다시 민적부를 정리하기로 하였다” 민적부(民籍簿)는 민적법(民籍法)에 따라 작성된 문서로 인구의 조사와 파악, 신분의 공시, 직업형성 등을 기록한 문서이다. 1910년 9월 경무국은 민적사무에 관한 자료와 해설을 담은『민적사무개요(民籍事務槪要)』, 민적조사의 통계를 담은『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를 동시에 발간하였다. 『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에 근거한『직업통계표』는 보다 진전된 호구파악 성과를 담았으며 면별 통계까지 수록하였다.『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는 11종으로
▲ 강성익 지사와 1920년대 제주시 모습 합성 제주도에는 ‘산북에는 박종실, 산남에는 강성익’ 라는 말이 있다. 강성익은 박종실과 함께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특히 산남지역 토지자본을 기반으로 해 제주경제의 큰 역할을 해오던 인물이다. 박종실은 근검절약과 신용 등을 상도의(商道義)로 자수성가해 모은 상업자본을 바탕으로 도소매업에 주력했는데 비해, 강성익은 토지자본에 기초해 운수업 분야에 주력했다. 또한 박종실은 상인단체 외에 정계진출에 관심이 없었지만 강성익은 상인단체는 물론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초대 제주도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원래 자본의 여유가 업는 도민이라 어떠한 사업을 경영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유리만 한 것이라면 외지의 대자본가가 출현하야 자본의 힘으로 독점하야 버리게 되니 도민은 호상단결하야 대자본의 침입을 금하는 동시에 모든 이권을 민중화(民衆化)하지 아니하면 생산보다 소비가 늘 초과하는 도민의 경제생활이 대단비참(大端悲慘)하게 될 날이 잇슬 것입니다(강성익, 동아일보, 1931년 1월 28일). 강성익은 개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던 1882년 9월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제주지역에 어업의 산업혁명이라
개항 이후 제주지역과 외부를 연결했던 최초의 해상교통은 1894년 이종문(李鍾文)이 인천 굴력상회(堀力商會)와 교섭하여 연안기선(沿岸汽船)을 한 달에 한번 씩 제주에 부정기 취항하도록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취항은 하물동량이 부족하고 승선 인원도 소수여서 수지가 맞지 않아 개설 3년 만에 폐지되었다. 이후 1908년 부산기선회사에서 부산-제주 간 월 1회 제주노선을 운항하였으며, 목포에서 복전회조점(福田回漕店) 소유 소기선(小汽船)이 제주-목포 간을 월 6회 왕복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의 명령에 의거한 정기 항로가 개설되었는데 명령 항로인 목포-제주 간 항해(都丸, 3,387톤급)의 운항코스는 목포-추자-제주(산지항)-조천항-제주(산지항)-추자-목포였다. 1913년에는 총독부 이토 해사 과장이 제주도를 시찰하던 중 ‘도 일주 항로를 개설한다면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목포를 기점으로 한 2척, 부산을 거점으로 제주도를 일주하는 2척을 매월 8회 정기적으로 운항하도록 하였다. 이 운영을 맡은 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는 목포-제주 간 월 9회, 부산-제주 간 월 5회 운항하였고, 일본 대판을 기점
▲ 제충국(除蟲菊) ‘제충국’이라고 하면 얼른 떠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실물을 보면 십중팔구는 ‘아~ 이게 제충국이었구나’라며 옛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집에 가면 여름밤 모기를 쫒기 위해 마당에 피웠던 풀이 제충국이던 것 같다. 이 제충국이 사실은 일제가 군수목적을 가지고 제주 농촌에 대량 보급하였던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환금(還金)작물이다. 제충국은 아시는 바와 같이 국과(菊科)식물에 속하고 페루시아종과 다루마채종과의 이 종류가 있다... 제충국의 유효성분은 피레트론이라 칭하는 갈색의 산성유상(酸性油狀)물질로 곤충류에는 극히 유해한 것이다. 이것은 미소(微少)한 특유의 향기를 유(有)하고 비상히 분해하기 쉽고 주정(酒精)에 쿠로로호름, 휘발치(揮發治)에 잘 용해되는데 아루카리 우(又)는 산(酸)에는 불용해이다(1940. 02. 03. 동아일보). 제충국(除蟲菊)은 아미리가(亞米利加) 과수원 등에서 절호(絶好)한 구제제(驅除劑)로 환영되는 것인바 일본시장에서는 매년 수출이 백만근에 달한다. 이것은 조선에도 재배에 적당할 뿐 아니라 농가의 항구부업으로 가장 적
1923년 우리나라 최초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여 기념식 및 각종 행사를 하였다. 1922년 3월 16일 동경에서 방정환(方定煥)선생이 어린이의 고유문화와 예술 활동을 진작시키며, 어린이의 인권의식을 고취할 목적으로 색동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1923년 ‘어린이날 선언’의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 오월 일일이 왔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의 대우를 하자고 떠느는 날이 도라 왔다. 조상적부터 아해나 어른이나 사람의 허물을 쓰고 사람으로 살지 못한 것은 우리의 골수에 박힌 원한이다. 지금에 우리 조선사람은 어른이나 아해나 누가 사람의 권리가 잇스며 사람의 대우를 밧는가 생각하면 실로 긔가 막히는 일이다. 첫재 먹을 것 입을 것이고 편안히 쉬일 집이 업는 터이라 사람 노릇을 하야 할지라도 할 수가 업는 것은 자연한 형세이라. 이에 뜻 잇는 몃 사람의 발기로 이러나게 된 소년운동협회(少年運動協會)라는 곳에서 졀믄이나 늘근이는 임의 희망이 업다. 우리는 오즉 남아지 힘을 다 하야 가련한 우리 후생(後生)되는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의 길을 열어주자 하는 취지로 오늘 오
또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경제학·사회복지학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의 ‘제주근대경제사 신문읽기’입니다. 비록 지금의 경제시스템과 여건이 구비돼 있다하지만 제주 역시 과거의 실타래가 얽히고 설킨 땅입니다. 기업과 산업이 척박했던 제주에도 그 맹아가 등장하던 시기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제주사회와 경제상황을 살핀 ‘신문’을 통해 그 시절의 기업·경제가 지금 우리 제주의 삶과 어떻게 연관·연동되고 있는지 가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단언컨대 제주사 정립을 위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분야는 화전(火田史) 연구다. 30여 년 전 한국사를 전공하던 선배가 ‘제주근대사 연구의 시작은 화전연구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화전의 존재와 의미, 무엇보다 화전연구의 중요성을 전혀 몰랐다. 제주지역의 전통농업 역시 화전을 빼고 논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제주의 전통농업 측면에서 화전을 살펴보고 다음 기회에 제주근대사 측면에서 본 화전과 화전민을 정리하려 한다. 제주도에서는 신라시대 이전부터 화전농업이 이루어 졌다. 김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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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경제학·사회복지학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의 ‘제주근대경제사 신문읽기’입니다. 비록 지금의 경제시스템과 여건이 구비돼 있다하지만 제주 역시 과거의 실타래가 얽히고 설킨 땅입니다. 기업과 산업이 척박했던 제주에도 그 맹아가 등장하던 시기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제주사회와 경제상황을 살핀 ‘신문’을 통해 그 시절의 기업·경제가 지금 우리 제주의 삶과 어떻게 연관·연동되고 있는지 가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고구마는 학명을 lonmoesaBattas라 하야 선화과(旋花科)의 다년생 초본이오. 원포(園圃)의 경작물인 것이니 그 원산지에 대하야 제설(諸說)이 잇스나 중앙아미리가(亞米利加)의 소산인 것을 콜롬보가 신세계 발견 후 토산(土産)으로 서반아(西斑亞)로 지래(持來)하야 구주(歐洲)로 아세아 제지(諸地)로 전파된 것이라. 고구마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무론 오래지 아니한 일이다. 본대 서반아인의 손에 인도양을 지나서 마닐라, 몰루카, 말레제도(諸島)로 전파되고 갱진(更進)하야 중국, 대만, 유구(琉球), 일본 등 차서(次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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