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대상자에게 최면을 걸어서 비의식(非意識) 상태를 만든다. 그리고 암시를 준다. “당신이 최면에서 깬 뒤에 시계가 2시를 치면 당신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엽니다.” 최면을 풀었다, 얼마 후 시계가 2시를 쳤다. 피험자가 자동으로 일어나 창문을 열였다. “왜 창문을 여십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그의 행동의 동기가 비의식에 있으므로 이유는 모르지만 암시받은대로 창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석가 이무석 선생이 쓴 <정신분석의 이해>(1995, 전남대학교 출판사)에 나온 내용이다. 무의식(비의식)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여러 증례 중 하나로 최면을 예시했는데 암시(suggestion)는 직접 무의식에게 언어적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피험자의 이성은 무의식이 어떤 메시지를 전달받았는지 모르고 있다. 이 증례에서 피험자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이라고 했지만, 다른 경우에는 그럴 듯한 이유를 대기도 한다. “음, 더워서...” 혹은 “방안 공기가 탁하게 느껴져서요.” 등.
사람의 이성은 생존에 영향을 줄 정도로 틀리지는 않지만 그다지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행동이 먼저고 해석이 나중인 경우도 많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언제나 그럴 듯하게 둘러대는 것이 이성이 하는 일이다. 아, 더워서 창문을 열었다지 않는가.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합리적 판단으로 행동한 것으로 굳게 믿는다. 신경생물학적으로는 ‘해석자’(해석자 모듈, 부위로는 특히 좌측 뇌 전두엽)가 늘 하는 일이다.
암시(suggestion)는 본격적인 정신분석의 길로 들어서기 전 최면 요법을 하던 프로이트가 사용한 치료 방법이기도 했다. <히스테리 연구>에서도 최면과 암시를 통해 치료를 하는 프로이트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최면 치료 효과는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일시적이었다. 재발이 잦았다. 게다가 최면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프로이트는 최면술에 실망하고 최면을 버렸다. 현대 정신분석은 암시를 백안시한다. 분석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암시로는 자신에 대한 어떤 통찰도 끝내 얻을 수 없다. 그래서는 근본적 치료와 거리가 멀뿐더러 오히려 해악이라는 것이 정신분석의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내 생각은 이렇다. 무의식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최면을 통해서만 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또한 '최면 암시'처럼 언어적 명령으로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난 암시에 대해 보다 광범위하게 생각하고 싶다. 그것은 ‘비언어적 소통’이다.
비언어적 소통은 전부는 아닐 지라도 많은 부분에서 의식적 자각이나 통제를 벗어나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상대방 역시 의식 아래에서 그 메시지를 전달받고 기대에 따른 반응을 한다. 마치 최면 암시에서 언어적 메시지를 전달받고 그에 맞는 행동을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진심(眞心)’이라는 말이 있다. 내담자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건강한 자기를 찾기를 바라고 기대하는 치료자의 진심(眞心)은 ‘비언어적 소통’으로 내담자의 ‘무의식’에 전달될 것이다. 내담자는 결국 그것에 반응하는 것이다. 비록 내담자는 치료자의 정신치료 기법과 해석이 뛰어나서 건강한 자신을 찾았다고 생각할 지라도 말이다.
난 케케묵은 신비주의자인가?
이범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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