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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9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현장(玄奘), 생졸 미상, 속칭 ‘당승(唐僧)’으로 당나라 때 유명한 고승이다. 불교를 독신했고 서천으로 불경을 얻기 위해 찾아갈 뜻을 세웠다. 천신만고 끝에 인도에서 진경(眞經)을 얻어 불경 75부 1335권을 번역했다. 그의 서역 취경(取經) 이야기는 중국 민간에 광범위하게 전파돼 소설 『서유기』의 모태가 됐다.

 

서천으로 불경을 얻기 위해 떠났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먼저 『서유기』의 당승(唐僧)을 떠올린다. 기이하면서도 특이한 소설 속에서 당승이란 이름은 천하에 알려지게 됐다. 이 당승의 원형이 바로 당나라 초기 승려 현장(玄奘) 법사다.

 

현장은 어릴 적부터 종명해 집안 어른들이 불법을 공부하도록 했다. 그러나 현장이 불법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많은 불경이 난해해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떤 것은 손상돼 완전하지 못한 것도 있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문제가 생긴 원인은 바로 번역의 질에 있었다. 당시 범문(梵文)에 통달한 학자들이 적었다. 당연히 번역자들의 수준도 많이 뒤떨어졌다. 이에 현장은 그런 혼란한 국면을 끝낼 결심을 한다. 그런 문제들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원을 캐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짜 불경을 구해야 된다고. 결국 젊고 호방한 현장은 웅대한 포부를 품고 멀고 먼 서쪽으로 불경을 구하러 떠난다.

 

 

 

 

현장법사의 공과 명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서천(西天)’으로 불경을 구하러 간 첫 번째 승려로 여기고 있다. 과연 그럴까? 처음 불경을 구하러 떠난 승려가 현장일까?

 

현장법사 이전에 동진(東晋) 고승 법현(法顯)이 천축(天竺)으로 불경을 구하러 갔었다. 법현(337-422)은 초기 중국 불교의 발전사상 큰 역할을 했으며 영향력이 큰 고승이다. 동진 융안(隆安) 3년(399) 그와 혜경(慧景), 도정(道整) 등 4명의 승려가 장안에서 출발해 장건(張騫)이 개척한 실크로드를 따라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떠났다. 도중에 법현은 또 지엄(智嚴), 보운(寶雲) 등 5명의 승려들을 만나 동행했다. 그들은 혼탁한 먼지가 하늘로 솟는 유사하(流砂河)를 지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고창국(高昌國, 현 위구르 투루판 지역)에 도착했다. 그중 여정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몇몇은 포기했다. 생사를 걸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축에 도달한 승려는 법현과 도정 2명이었다. 두 승려는 천국의 마가연사(摩訶衍寺)에서 거주하면서 『살파다중율(薩婆多衆律)』, 『잡아비담심경(雜阿毗曇心經)』 등을 공부했다.

 

법현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은 승려였다. 14년간 해외여행을 하면서 30여 국가를 돌아다녔다. 고생 끝에 법현은 거둔 거대한 수확이 그가 번역한 『마가승지율(摩訶僧祗律)』로 세계에서 현존하는 불교 대승부(大乘部) 계통의 두 종의 율 중 하나다. 그는 또 자신이 역정을 『역유천축기전(歷游天竺記傳)』에 기술했는데 육해 교통을 중국 최초로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법현도 중국에서 서천으로 불경을 가지런 간 최초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에 승려 주사행(朱士行)이 천축국으로 불경을 가지러 갔었다고 한다. 주사행도 불경을 연구할 때 번역본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너무 많은 부분이 다듬고 고쳤고 맥락이 모호하며 말이 애매할 뿐만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아 불경을 공부하는 승려들이 곤란을 겪었다. 불경을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 주사행은 서천으로 가 범문진경(梵文眞經)을 찾아 새로 번역하려 했다.

 

그는 장안에서 출발해 태양을 판별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 도중에 인골과 동물 뼈들을 이정표로 삼으면서 전진했다. 마지막에 대승경전의 집산지였던 전국(闐國, 호탄, 카라카쉬[Qaraqash] 지역)에 도착해 『방광약(放光若)』범본(梵本)을 얻었다. 주사행은 한 줄 한 줄 베껴 적었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서진(西晉) 태강(太康) 3년(282)이 돼서야 제자가 필사본을 몰래 낙양으로 가지고 올 수 있었다. 주사행의 불경을 가지러 서쪽으로 떠난 목적은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이라 할 것이다. 비록 그가 불교의 성지인 천축은 가지 못했으나 결국 서쪽으로 불경을 가지러 갔던 선구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주사행이 진정한 의미에서 ‘서천’으로 불경을 가지러 간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법현대사가 현장법사 보다는 먼저 천축으로 진경을 찾아 떠난 것만은 사실이다. 현장이 비록 서천으로 불경을 구하러 떠난 최초의 인물이 아닐지라도 광범위하게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그가 당시 불경을 가지러 가는 도중에 만났던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은 설령 『서유기』속에서 묘사한 만큼의 고난이라고 하지는 못할지라도 필설로 엮을 수 없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은 당연하다.

 

 

 

 

현장이 처음 정부에 천축으로 불경을 가지러 떠나겠다고 했을 때 허락을 받지 못했다. 당나라가 초기 단계에 있어 국력이 그리 부강하지 못했고 국가도 태평하지 못한 상태로 정권의 안정을 위해 승려들이나 백성들이 출국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장은 어찌할 도리 없이 경성에 잠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괜찮았다. 먼저 범어를 확실히 공부하여 나중에 불경을 번역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실력을 닦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지만 조정은 여전히 출국을 허락하지 않자 현장은 기다릴 수 없었다. 정관(貞觀) 3년(629) 현장은 금지령을 어기고 출국하기로 결심한다.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난주(蘭州)에서 단을 설치해 불법을 펼쳐 많은 청중을 불러 모았다. 많은 서역 상인들이 현장이 천축으로 가려한다는 것을 듣고는 아끼지 않고 주머니를 열었다. 많은 돈을 내는 사람도 있었고 여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주의사항이나 연락방법 등을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마침내 현장은 출발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 자신을 체포하라는 명령서를 어느 사찰에서 보게 됐다. 낮에 길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게 돼 버리자 밤에 별빛에 의지해 길을 걸었다. 가장 위험했던 상황은 옥문관(玉門關)에서 벌어졌다. 변방을 지키던 병사에게 발각돼 하마터면 군인의 화살에 죽을 뻔 했었다.

 

메마른 사막을 건너 현장은 마침내 고창국(高昌國, Qara-hoja)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국왕에게 불법을 설법해 존귀한 예우를 받았다. 국왕은 그가 고창국에 남기를 성심으로 청했다. 더불어 모든 백성을 그의 제자로 삼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현장은 완곡히 거절했다. 국왕은 어쩔 수 없어 소부대와 면 500필, 서신을 가지고 떠나게 했다. 현장을 안전하게 돌궐 야브구(Yabgu)의 직할지까지 송별했다. 당시 대설산 이북 60여 개 국가는 모두 고창국의 속국이었다. 고창국 국왕의 서신을 가진 현장이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순조롭게 ‘토하리인(Tocharians , 睹貨羅)’에 이르렀다. 기온이 온화하고 꽃과 과일나무가 무성했다. 서행 여정 중 가장 아름답고 편했다. 나중의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7백여 리가 넘는 설산이 버티고 있었다. 현장은 추위와 눈사태, 광풍, 미로 등의 고난을 이겨내고 람파카(Lampaka, 濫波國)에 도착했다. 그곳이 천축국 북쪽 경계로 들어서는 관문이었다. 그곳부터는 확 트인 길이었다. 현장은 발길을 재촉해 순조롭게 마침내 불경을 가지러 가려는 목적지 ‘서천(西天)’ 즉 천축 불교계 최고의 학부 ‘날란다(Nalanda, 那爛陀寺)’에 도착했다.

 

사원은 기세가 대단했다. 명승들이 운집해 있었다.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시라바드라(계현[戒賢]) 대법사가 당시 주지로 있었다. 백세가 넘었으면서도 여전히 심신이 굳건하고 튼튼했다. 현장이 천축에 도착하기 전부터 그의 이름이 천축에 알려져 있었다. 사람이 도착하자 날란다는 축제 분위기가 됐다. 계현 법사가 친히 융숭한 불교의식을 집행해 멀리 떨어진 동토(東土)에서 온 고승을 환영했다. 두 고승은 서로 너무 늦게 만난 것을 한하며 공경을 표했다.

 

 

 

 

현장은 천축에서 고생고생하며 15년 동안 불법을 공부했다. 그리고 서쪽으로 온 목적을 달성했다. 그때에는 그의 이름이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돌아가는 도중 연도의 승려와 백성, 그리고 각국의 관원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당나라 정관 19년(645) 정월, 현장이 드디어 장안으로 들어섰다. 장안의 수십만 군중들이 영웅을 맞이하는 것처럼 불경을 가지고 돌아온 현장을 환영했다. 태종 황제도 흔쾌히 현장을 접견하고 그를 위해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현장의 비범한 학문과 고상인 인품은 당태종을 감복시켰다. 태종은 여러 차례 세속으로 돌아와 정사를 맡아 달라고 청했으나 현장은 완곡하게 사절했다.

 

현장이 ‘서천’으로 여행을 떠난 기간은 16년이다. 16년이란 세월은 그 개인의 일생 중 가장 혈기왕성했던 시기였다. 현장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마음으로 맹세한 목적을 원만하게 완성했다. 그가 가지고 온 657부 불경은 중국 역대 서역으로 불경을 가지러 떠났던 그 어떤 승려보다도 많은 수였다. 현장은 도량이 넓었다. 영화를 바라지도 않았고 권세를 탐하지도 않았다. 시종일관 불법에 귀의해 불경을 공부하고 불도를 닦았으며 불경을 번역했다.

 

중국으로 돌아간 후 19년 동안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번역 작업에 몰두했다. 불경 75부, 총 1335권을 번역했다. 현장법사의 심오한 학식과 사상, 그리고 정통한 범문의 능력을 가지고 불경을 번역했기 때문에 전대에 오류를 수정할 수 있었다. 그는 중국 불교계에 제대로 부처님 말씀을 전한 인물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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