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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0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이백(李白 : 701-762),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아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다. 그의 집안은 감숙(甘肅)성 농서(隴西)현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 사천(四川)성 촉(蜀)나라의 창명(彰明)현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장강을 따라 강남(江南), 산동(山東), 산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는 도교(道敎)에 심취해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라 본다. 산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했다.

 

이백이 43세 되던 해(724)에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가 한림공봉(翰林供奉)이라는 관직을 하사받았다. 하지만 그는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아 ‘적선인(謫仙人)’이라 평가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다.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역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장안을 떠나게 됐다. 낙양(洛陽), 개봉(開封) ; 산서(山西), 하북(河北) ; 광릉(廣陵, 현 양주[揚州]), 금릉(金陵, 남경[南京]) ; 회계(會稽, 소흥[紹興])로 갔다.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금릉 등지를 방랑했으나 노쇠해 당도(當塗, 안휘[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탁하다 세상과 하직했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해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했고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했다. 민산(岷山)에서 선술(仙術)을 닦기도 했다. 방랑은 자유를 찾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백은 낭만주의자였다. 현실 사회나 국가에 대해 관심도 많았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해서도 관주했다. 세상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찾아 나선 인물이었다.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곳에서 노닐었다. 술이 바로 그것을 실천하는 수단이었다. 이백에게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은 하나였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분류보주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이 있다.

 

유사 이래로 가장 재능이 있는 중국의 시인 중 하나인 이백은 보응(寶應) 원년에 세상을 떠났다. 62년의 생애였다. 이백이 어떻게 죽었느냐는 문제에 대한 관점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고 하나는 과도한 음주로 인해 죽었다는 것이다.

 

당 덕종(德宗) 정원(貞元) 6년에 지은 유전백(劉全白)의 『당고한림학사이군갈기(唐故翰林學士李君碣記)』에도 “군의 이름은 백이다. 천보 초에 하향하라는 명령을 받고 우연히 이곳에 이르렀는데 질병으로 하직하니 이곳에 묻혔다. 전백이 어릴 적에 시로 군을 알게 됐는데 이곳에 이르러 조문하게 됐다. 황량한 무덤 장차 훼손되려 한다. 음성과 용모를 회상해 보니 슬픔이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고대 문헌에 이른바 ‘질극(疾亟)’, ‘이질종(以疾終)’ 등의 표현은 모두 이백이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백이 일생동안 술을 즐기는 것이 습성이 됐다는 것은 유명하다. 그래서 ‘주선(酒仙)’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백의 시를 읽으면 짙은 술맛을 느낄 수 있다. 이백의 「장진주」에 “양을 삶고 소를 잡음도 즐거움을 위한 것이니 한 번 마시면 삼백 배를 마셔야 하나니(烹羊宰牛且爲樂,會須一飮三百杯)”, 「서구증강양재육조」에 “크게 웃으며 같이 취하여 평생을 즐기려 한다(大笑同一醉,取樂平生年)”, 「증유도사」에 “고담준론이 사방에 가득하니 하루에 천 배를 기우렸네(高談滿四座,一日傾千觴)”, 「월하독작3」에 “취한 뒤에는 천지(天地)도 잃어버려 멍하니 외로운 베개를 베는구나. 내 몸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니 이런 즐거움이 최고의 기쁨이로다(醉後失天地,兀然就孤枕,不知有吾新,此樂最爲心)”, 그리고 「수잠훈견심취원단구(詶岑勛見尋就元丹丘)」에 “얼굴을 펴고 미주를 따르니 즐거움 지극하여 홀연히 취하네(開顔酌美酒,樂極忽成醉.)” 등의 구절이 그것이다. 이러니 학자들이 이백의 죽음을 술과 연관 시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당(晩唐) 시인 피일휴(皮日休)는 「이한심시」에 “마침내 늑막이 썩는 병을 얻어 취한 영혼 팔극으로 돌아갔네(竟遭腐脇疾,醉魄歸八極.)”라고 읊었다. 이는 이백은 술을 너무 마셔 치명적인 만성늑막염과 같은 질병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뜻이다. ‘취백(醉白)’이라고 까지 했으니 하늘로 올라간 영혼에서도 취기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이백은 술을 좋아한 만큼 달도 좋아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백의 죽음을 달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바로 ‘水中捉月(수중착월)’이 그것으로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물에 빠져 죽었다”는 설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이백은 술을 즐기고 달을 좋아했다.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경지를 추구한 것이다. 그중 달은 술과 마찬가지로 이백의 영원한 연인이요 이백 시의 원천이자 추동력이었다. 오대(五代) 때 왕정보(王定保)는 『당척언(唐摭言)』에서 “이백은 궁중 비단 금포를 걸치고 채석강에서 노닐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오연히 스스로 만족했다. 너무 취해 물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빠져 죽었다”고 했다. 이후 원(元)대 신문방(辛文房)도 『당재자전(唐才子傳)』에서 “이백은 만년에 황로를 좋아하였고 우저기(牛渚磯)를 지날 때 술을 마시고 달을 잡으려고 하다가 물속에 빠졌다. 젊었을 때는 사(謝) 가의 청산을 좋아하였지만 묘는 지금 여기에 있다”고 했다. 같은 시대 축성집(祝成輯)도 『연당시화』에서 “송(宋) 호박(胡璞)은 복건(福建, 민[閩]) 검남(劍南) 사람이다. 일찍이 채석도를 지나면서 제시를 지어 이백을 추모했다. ‘금란전에 항의하다 오히려 원수같이 돼 문제 되자 이 강가까지 빠져 나왔네. 당시 취하여 파도 사이의 달을 찾았고 지금은 차가운 빛이 만 리를 흐르누나(抗議金欒反見仇,一壞蟬蛻此江頭,當時醉尋波間月,今作寒光萬里流.)’ 소식(蘇軾)이 보고는 당나라 사람이 지은 것으로 잘못 알고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송나라 대문호 소동파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을까? 송나라 진선(陳善)의 『문슬신화(捫虱新話)』에 “소동파는 또 「증반곡(贈潘谷)」 시에서 ‘아침에 바다에서 이백을 찾았으나 세상에 의협의 신선이 그려진 것만 보았네(一朝入海尋李白,空看人間畵墨仙.)’라고 읊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렇듯 이백이 취해 강에서 달을 잡으려다 익사했다는 견해는 예부터 광범위하게 전파돼 있었다.

 

보아하니 이백의 사인(死因)은 음주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병사했는가 아니면 익사했는가? 두 가지 가능성 모두 아니라고 하기가 쉽지 않다. 이백의 일생은 낭만적인 삶이었다. 시적인 정취가 가득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도 세인을 뛰어넘고 세속의 티를 벗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시선(詩仙)이라는 아름다운 칭호에 어울리게 “시를 위해 살고 시를 위해 죽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스스로 대붕(大鵬)이나 준마인 녹기(騄騏)에 비유했던 이백. 넘치는 자긍심과 남다른 의협 정신으로 현실에 참여해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했었다. 물론 뜻을 이루면 조용히 물러날 것이고.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뜻을 펼친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백은 낭만을 달에서 찾았고 탈속을 술에서 찾았다. 시와 달과 술! 이백이다.

 

 

 

 

「선주사조루전별교서숙운(宣州謝朓樓餞別校書叔雲)」: 선주 사조루에서 교서인 숙운을 전별하다.

 

棄我去者(기아거자), 날 버리고 떠나는 자
昨日之日不可留(작일지일부가류). 어제의 날은 붙잡지 못하네.
亂我心者(난아심자), 나를 어지럽게 하는 마음
今日之日多煩憂(금일지일다번우)! 오늘의 날은 근심이 많네.
長風萬里送秋雁(장풍만리송추안), 긴 바람은 만 리를 불어와 기러기 떼 보내오니

對此可以酣高樓(대차가이감고누). 이를 대하여 높은 누대에서 술 즐길 만하네.
蓬萊文章建安骨(봉래문장건안골), 그대 문장은 봉래문장이요 건안의 풍격이라.
中間小謝又淸發(중간소사우청발). 중간 중간 사조의 기풍 청신하고 수려하구나.
俱懷逸興壯思飛(구회일흥장사비), 빼어난 흥취 품고 장중한 생각이 날아올라
欲上靑天覽明月(욕상청천람명월). 푸른 하늘 위에서 밝은 달을 보고자 하네.
抽刀斷水水更流(추도단수수갱류), 칼을 빼어 물을 잘라도 물은 다시 흐르고
擧杯銷愁愁更愁(거배소수수갱수). 잔 들어 수심을 삭여도 근심은 다시 근심 되네.
人生在世不稱意(인생재세부칭의), 세상살이 뜻과 같지 않으니
明朝散發弄扁舟(명조산발농편주). 내일 아침 머리 풀어 조각배 타고 놀련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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