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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33)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남옥(藍玉 : ?-1393) 정원(定遠, 안휘安徽성) 사람이다. 처남 상우춘(常遇春)을 따라 공을 세워 대도독부첨사(大都督府僉事)가 됐다. 1371년에 촉(蜀)나라를 토벌하고 1378년에는 서번(西蕃)을 정벌해 그 공으로 영창후(永昌侯)에 봉해졌다. 1387년에는 풍승(馮勝)을 따라 원나라의 나하추(納哈出)를 정벌해 대장군이 됐고 다음해 원나라 순제(順帝)의 아들 토구스 테무르(脫古思帖木兒)의 몽골에 원정해 승리를 거둬 양국공(凉國公)에 책봉됐다. 1390년에는 후광(湖廣) 만족의 반란을 평정하고 다음해에는 서번의 한동(罕東) 땅을 공략해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됐다. 그러나 자신의 무공을 내세운 방자한 행동 때문에 모반죄로 체포돼 처형됐다. 그에 연좌된 자가 2만 명에 이르렀다. 이것을 ‘남옥의 옥(獄)’이라고 한다.

 

호유용(胡惟庸 : ?-1380) 안휘(安徽) 출신이다. 명 태조(太祖)가 원(元)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태조와 행동을 같이했다. 명나라 성립 후 차차 벼슬이 높아져 마침내 좌승상(左丞相)이 돼 황제의 신임을 얻으면서 권세를 누렸다. 그런데 결국 이선장(李善長)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죄명으로 처형됐다. 이 사건에 연루된 자만도 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 중서성(中書省)이 폐지되고 황제의 독재체제가 한층 더 강화됐다.

 

 

 

 

명나라 초기 호유용, 남옥의 옥안(獄案)을 역사적으로 ‘호람지옥(胡藍之獄)’이라 부른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이 두 사건을 빌미로 대대적으로 살육을 벌인다. 홍무(洪武) 13년에서 26년까지 14년 동안 그는 명나라 초기 개국 공신을 거의 모두 주살한다. 연루돼 피살된 자가 45000명에 이르는 미증유의 최대 옥안(獄案)이다.

 

주원장은 왜 그렇게 살육을 자행했을까? 후세 사람들이 끊임없이 탐구하는 문제다.

 

명 왕조 개국 황제 주원장은 빈민 출신이다. 황각사(皇覺寺)에 들어가 승려가 됐었고 나중에 ‘홍건군(紅巾軍)’에 의탁한 후 명 정권을 세울 때까지 십 몇 년을 말 타고 전장을 누볐다. 바로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자였다. 그의 성공에는 전략전술을 세우고 전투에 능한 문신과 무장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 개국 공신들 모두에게 관직을 하사했다. 그중 주원장의 고향인 호주(濠州), 봉양(鳳陽) 사람이 6개 국공(國公), 28개 후(侯)나 되었다. 그들은 이선장(李善長), 호유용을 중심으로 세력이 강대한 ‘회서방(淮西幇)’이라는 정치 그룹을 이루었다.

 

호유용 이전의 승상이었던 이선장은 조심하고 신중했고 왕광상(汪廣詳)은 유약하고 술을 좋아했으며 서달(徐達)은 매년 군대를 통솔해 변방에 있음으로써 명 태조 주원장과 큰 충돌은 없었다. 그런데 호유용은 승상이 된 후 세도를 부리며 생사여탈권을 맘대로 휘둘렀다. 그는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를 제멋대로 읽고 독단적으로 처리하며 자신에게 불리한 상소는 은닉해 보고하지 않았다. 또 주원장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관원의 생사여탈을 전횡했다. 그리고 조정에 개인 세력을 키웠으며 군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문하에는 문신 무장이 뒤섞여 모여들면서 막강한 정치 그룹이 형성됐다. 주원장은 이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권과 신권(臣權)의 충돌이었다.

 

홍무 13년 주원장은 ‘천권식당(擅權植黨, 천권하고 도당을 이루다)’의 죄명으로 좌승상 호유용을 주살하고 동시에 호유용과 긴밀하게 왕래했던 관원들의 가산을 몰수하고 멸족시켰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옥안(獄案)을 대대적으로 일으키면서 ‘호유용 옥안’ 연루자를 확대시켰다.

 

홍무 23년, 공신인 이선장 등도 호유용과 함께 ‘모반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주살했다. 당시 이미 77세나 된 이선장은 자결을 명받았다. 가속 70여 명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회서방’에 연루된 이성(異姓) 공후 가족들 모두 극형에 처해졌다. 명유(名儒)이면서 문학가인 송렴(宋濂)도 손자가 연루됐다는 이유로 전 가족이 사천(四川)으로 쫓겨 가는 도중에 병사했다. 이 옥안은 장장 10여 년 동안 이어지면서 피살된 자는 몇 십 가의 왕공 귀족 30000명에 이른다.

 

 

 

 

남옥은 개국 공신 상우춘(常遇春)의 처제다. 변강을 평정한 공로로 양국공에 봉해 졌다. 그러나 남옥은 사람됨이 거만하고 난폭해 민전(民田)을 강점하고 민가의 부녀자로 축첩했으며 수많은 양자들이 세력을 믿고 남을 업신여겼다. 주원장은 그런 일에 대해 여러 번 꾸짖었다. 홍무 26년 특무대 금의위(錦衣衛)가 남옥이 ‘모반’을 꾸몄다고 고발하고 고문을 행한 후 엄형에 처했다. 남옥의 온가족이 죽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열후(列侯) 이하 멸족된 집안이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옥안과 연루돼 피살된 자들이 15000명이 이른다. 이 사건으로 용감하고 강직한 장수들이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렇게 ‘회서방’의 군사 세력은 완전히 궤멸됐다.

 

‘호람지옥’에 연루돼 피살된 자들 이외에 다른 공신들도 여러 이유로 주원장에 의해 피살됐다. 예를 들면 주원장의 조카 주문정(朱文正)은 진우량과 전투 중 남창(南昌)을 85일 동안 고립된 채로 굳건히 지켜내면서 큰 공을 세웠지만 주원장에게 “유생들과 가까이 하면서 마음속에 원망을 품었다”는 죄명으로 채찍질을 당해 죽는다. 개국 제1공신 서달은 주원장과 환란을 함께한 전우였다. 그런데 홍무 18년 그가 등창이 생기자 주원장은 그 병에 찐 거위고기가 가장 금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를 쓰고 찐 거위고기를 하사하고는 사자 앞에서 먹게 해 오래지 않아 병이 중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 하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탕화(湯和)만이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왜 ‘호람지옥’을 대대적으로 일으켰을까? 분석을 해보면 대체적으로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론된다.

 

하나는 황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주원장은 중국 봉건사회에서 유일한 빈민 출신 황제였다. 황제의 자리에 앉기 이전 주원장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친구들과 허물없이 동등하게 지냈다. 그런데 황제가 된 후 정치체제는 황제인 주원장을 신성화해야 했다. 갑자기 주원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하로 청해야 했으니 그런 큰 변화에 그들은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외에 그들은 천하를 평정한 후 새로운 귀족이 되면서 다량의 농토와 거택을 소유하게 됐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더욱더 확대하려 하면서 주원장의 통치 집단의 이익과 충돌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호유용의 ‘월권’과 남옥의 ‘거만’한 태도는 황제인 주원장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원장은 옥안을 수차례 일으키면서 자기의 통치를 공고히 했다. 그저 불충한 신하를 처치하는 단순한 행위는 결코 아니었다.

 

 

 

 

둘째는 강산을 영원히 보전하기 위해서이다. 주원장은 41세 때 칭제했다. 그리고 천하가 모두 평정된 때는 이미 60세가 돼 버렸다. 스스로 빈민 백성에서 일약 황제의 자리로 도약했으니 약한 자손들이 강산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느냐는 문제가 주원장의 최대 고민이었다.

 

주원장이 대대적으로 살계를 범할 때 문약한 태자 주표(朱標)가 그에게 더 이상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지 말 것을 권했다. 군신 간에 화목을 해쳐서는 안 되지 않겠냐고도 했다. 그때 주원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주원장은 가시나무 지팡이를 땅에 던지면서 주표에게 주워오라고 했다. 주표는 지팡이의 가시 때문에 난색을 표했다. 그때 주원장이 가시나무 지팡이를 주워들고 칼로 날카로운 가시를 다듬은 후 주표에게 건네주면서 말을 했다.

 

“네가 가시가 겁나 감히 집어 들지 못하지 않았느냐. 내가 대신 그 가시들을 모두 제거하고 네게 건네주니 좋지 않느냐. 내가 죽이는 자들은 간악한 놈들이다. 제대로 내부를 정돈해야 네가 편하게 이 집 주인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

 

절대 황권을 세우기 위해 주원장은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 수단이 잔인하든 야만적이든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봉건사회에서 최고 권력인 황제 그 자체가 인간적이지 못한 것임에.

 

주원장은 자신의 자손을 위해 생사를 같이 했던 공신들을 거의 모두 주살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자손들끼리 골육상쟁을 벌여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뿌린 대로 걷었다는 것을.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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