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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회]왜구의 침임에 대비하여 쌓은 명월진성(明月鎭城)

 

명월진성에는 성곽길이 없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역할분담을 맡은 교직원들이 한 말이다. 그럴리가. 내가 걸었던 그 길이 성곽길인데. 성곽길을 찾기 위해 그들과 동행하였다. 농로로 변한 성곽길은 마치 온갖 쓰레기가 널브러진 하치장 같았다. 그러니 찾지 못할 수 밖에.

 

농로로 변한 성곽길을 성곽길답게 가꾸는 일이 우리들의 몫이었다. 아니 학교의 몫이라기보다 문화재 관리를 맡은 기관의 당연한 몫이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발 벗고 나서지 않다보니 지금도 농로길로 방치되고 있다. 거만한 부자 3대 못 간다는 선인들의 음성이 들리듯 하다.

 

한림읍 동명리에 위치한 명월진성(제주도기념물 제29호)이 지어진 것은 비양도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왜선이 비양도 주변에 자주 정박하여 민가에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해 1510년(중종 5년) 목사 장림이 이곳에 목성을 쌓아 진을 구축하였다.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동문•서문•남문이 있고, 동•서•남쪽으로 1칸의 초루(譙樓)가 있으며, 성안에는 샘이 있어 사시사철 물 걱정이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샘물을 ‘조물’이라 하는데 그 위치에 지금은 정수장이 자리 잡고 있다.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에는 ‘명월포는 제주 서남쪽 60리에 있는데, 중종 5년 겨울에 목사 장림이 명월포에 본성을 쌓았다. 비양도가 가까워 왜선들이 번갈아 정박하기 때문이다. 1592년(선조 25 년) 이경록 목사가 돌로 성을 다시 쌓았고 연변의 정박할 만한 곳에는 다 보루를 쌓았다. 둘레는 3050척(1척 30㎝)이고 높이는 9척 이다. 세 개의 문이 있는데 문 위에는 모두 초루가 있다. 안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 하다.’라고 쓰여 있다.

 

명월진에는 만호 1명, 치총 4명, 수솔군 82명, 성정군 330명, 유직 군 99명, 진리 22명, 서기 30명 등 총 568명이 있었으며, 2봉수(도내 봉수, 만조봉수)와 7연대(귀덕연대, 우지연대, 죽도연대, 마두연대, 배령연대, 대포연대, 두모연대)를 관할하였다. 성벽은 북서와 남동 방향 장축의 타원형으로, 성벽의 요소에 치성을 두어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 3칸, 객사(客舍) 3칸, 사령방(使令房) 2칸, 공소(供所) 2칸, 공수(公需) 2칸, 무기고(武器庫) 4칸, 도청(都廳) 4칸, 진고(賑庫) 4칸, 창대청(倉大廳) 3칸, 중화청(仲和廳) 2칸, 진졸청(鎭卒廳) 3칸과 창고 각 2칸이 있었다.

 

 

명월진의 책임자인 만호는 조선후기 무관직(종4품) 벼슬로, 명월 진성 남문 앞에는 112명 만호들의 재직기관 등을 적은 만호기념비가 제주방어사령부에 의해 세워져 있으며, 진성 북쪽 만호기념비 옆에는 오래된 만호공덕비 5기도 있다.

 

 

명월진은 하도의 별방진 성내에 있었던 동별창과 더불어 제주목의 중요한 창고이기도 했다. 명월진성 내의 병고(兵庫)와 서별창 (西別倉)에는 3300여 석의 곡식과, 흑각궁•향각궁•교자궁•장전• 환도•천자총 등 주요 무기류가 보관되어 있었다.

 

1764년 어사 이수봉이 영조대왕에게 아뢰어, 조방장(助防長)을 만호로 승격시켜 제주출신을 임명케 하였다. 성내에는 수군만호(현 제주방어사령관에 해당되는 직위)가 주둔하였고 활터가 네 곳 있었다. 명월진의 남문 지(南門址)와 별방진의 서문지(西門址)에서는 옹성(甕城)의 흔적도 확인된 바 있다.

 

복원된 명월진성은 어딘가 생뚱맞은 듯하다. 오래전 쌓은 기단석과 최근에 복원하면서 쌓은 성담이 확연히 구분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옛 성담으로 복원하는 구축기술에 좀 더 신중함이 필요하다. 그래도 방치하는 것보다 복원한 것이 훨씬 잘한 일이긴 하다.

 

제주도에는 섬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조선 초•중기에 설치한 9개의 진(鎭)이 있었다. 화북•조천•별방•수산•서귀•모슬•차귀• 명월•애월 진이 그것이다. 이들 진성들은 수산진성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해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는 진성의 설치 목적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것임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명월진성 서쪽 경작지에서 무문토기편•대팻날•갈돌•숫돌 등 석기시대의 유물이, 주호시대 유물인 곽지리적갈색토기•돌도끼•홈 돌•갈판 등이 출토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다고 여겨진다. 이곳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유물이 모두 발견된 곳인 만큼, 관련 유물의 모조품이라도 전시하는 시설이 들어서기를 제안해 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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