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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7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우라나라(UlaNara, 오랍나랍(烏拉那拉), ?~1766) 황후는 좌령(佐領) 나르부(Narbu, 나이포(那爾布))의 딸로 홍력(弘歷)에게 시집가 측복진(側福晉)이 됐고 건륭(乾隆) 2년(1737) 한비(嫻妃)가 됐다가 귀비(貴妃)에 오른다. 효현(孝賢)황후가 죽자 황후로 책봉된다.

 

건륭 30년 황제를 따라 남순(南巡)하다 건륭제와 사이가 벌어진 후 분노를 참지 못해 삭발했다. 이듬해 북경에서 죽었다. 성격이 강직하고 외곬이라 건륭제의 여성관계를 가지고 여러 번 아옹거려 건륭제가 싫어하게 됐다. 죽은 후 귀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2남 1녀들 뒀는데 딸은 요절했다.

 

건륭제의 정처 푸차(부찰(富察)) 씨가 죽자 황후가 된 우라나라 씨는 건륭제보다 일곱 살이 어렸다. 열서너 살쯤에 수녀(秀女)에 뽑혔다. 당시 건륭제는 황자로 번저(藩邸)에 있었는데 옹정(雍正) 황제가 측실 복진으로 하사했다.

 

홍력이 즉위 후 건륭 2년 후비 책립 의식을 거행할 때 20세가 된 우라나라 씨를 한비(嫻妃)로 책봉했다. 온유하고 부덕한 그녀는 황태후 니오후루(Niohuru, 뉴호록(鈕祜祿)) 씨의 사랑을 받았다. 건륭 10년 10월에 한귀비로 올리라는 의지(懿旨)를 내려 그녀의 온유한 성격에 대해 상을 내렸다.

 

 

귀한 집안 출신이었던 푸차 씨와는 다른 출신성분을 가졌다. 그의 부친인 나르부는 좌령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었지만 집안의 경제적 상황이 부유하지 못했다. 만주의 공신 세도가와 비교하면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하는 위치였다.

 

우라나라 씨는 심계가 깊은 여인이었다. 몸이 왜소하고 나약했지만 행동거지가 의젓했으며 언사가 부드러워 태후와 이야기를 나눌 때 고분고분한 느낌을 받게 만들었다. 이미 푸차 씨가 세상을 떠났으니 황태후는 우라나라 씨를 건륭제의 제2의 황후로 앉히기로 결정했다.

 

태후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경력이 많은 비빈은 건륭제와 함께 한 시간이 길기 때문에 건륭제의 성격을 알겠고 그의 호오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반 여자들보다도 어떻게 하면 황제를 제대로 위안할까 고민할 것이고 그 방법도 잘 알 것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경력이 풍부한 비빈은, 황제를 일이십 년 모시고 열심히 일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았고 성실했으며 황제 가문에 공헌한 바가 많으니 응당히 보답을 받아야 하리라. 그렇게 경력 있는 비빈 중에서 황후를 골라야 한다면 마땅히 옹정제가 건륭제에게 하사한 비빈 중에서 선택해야 하리라. 이런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우라나라 씨가 아닌가. 그렇게 측복진 신분이었던 우라나라 씨는 황태후에 의해 간택됐다.

 

우라나라 씨가 동궁으로 들어간 이후의 생활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국 봉건사회에서 제왕의 가족 일원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호랑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군왕에게 죄를 지으면 아무리 존귀한 황후라 할지라도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다.

 

결국 어느 날, 건륭 30년에 고종(高宗)의 남순 도중 우라나라 황후가 웬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의 노여움을 사 예정된 날짜 이전에 도성으로 돌려보내진 후 황궁 안에 구금되고 오래지 않아 처참하게 죽는다.

 

우라나라 씨가 병사하고 10년 후 건륭제는 군신들에게 황후가 생전에 “정신 이상으로 거의 미쳐”, “스스로 삭발”한 적이 있다고 발표하면서 알려졌다. 그때부터 민간에는 청 황궁에 ‘삭발 황후’가 있다는 말이 돌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황후가 삭발한다는 것은 청나라 풍속으로는 용납될 수 없었다.

 

우라나라 씨는 어째서 공공연하게 그런 패악을 저질렀는가? 무슨 까닭에 황후가 ‘미쳐’ 날뛰면서 건륭제로 하여금 그녀와 인연을 끊게 만들었고 폐위에 가까운 행동을 하게 만들었는가? 삼엄한 궁궐에서 내전의 일은 비밀에 붙여지고 밖으로 알려지지 않으니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건륭제 부부가 항주(杭州)에서 반목한 사건은 금기로 여겼는지 관부의 문서에는 그 전후 사정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사학계에서조차 지금까지도 상세하면서도 믿을 만한 원시 기록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어쩌면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래 두 가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첫째, 문제가 생긴 남순을 시작하기 이전 건륭제와 황후 우라나라 씨 사이에 이미 틈이 나 있었다. 강소(江蘇), 절강(浙江) 일대에 이르렀을 때 건륭제가 황후에 대해 심한 불만을 표시했고, 당시 황제와 황후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 관계가 생겨나 있었다.

 

31년(1766) 7월, 건륭제는 그 일을 회상하면서 “작년 봄, 짐은 황태후를 모시고 강소와 절강 일대를 순행하면서 재미있게 지내고 있을 즈음, 황후가 비정성적으로 돼 황태후 면전에서 공경하고 효도를 다하지 못하게 됐다. 항주(杭州)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행위가 더욱 올바른 도리에 위배돼 거동이 미친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남순 도중 강소, 절강에 다다랐을 때 이미 우라나라 씨가 건륭제 자신에게 공손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표출하고 있다. 황태후 면전에서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고 한 것은 핑계일 따름이다.

 

 

둘째, 항주에 있을 때 건륭제와 우라나라 씨가 심한 말다툼을 했다. 부부 사이에 반목이 생겼다. 우라나라 씨는 극도로 절망해 삭발하고 출가하겠다고 했다. 황후가 삭발한 일에 대해 건륭제는 처음에는 피하며 말을 꺼렸다. 그저 “거의 미쳤다”고 책망했을 뿐이다.

 

10여 년 후 풍설이 나돌자 건륭제가 비로소 진상의 일부를 공개했다. 그는 “우라나라 씨는 본래 짐이 청궁(靑宮)에 있을 때(황자의 신분일 때) 황고(皇考)께서 측실 복진으로 하사하셨다. 효현황후가 붕어한 후 순서에 따라 황귀비가 됐고 3년이 지나 황후에 봉해졌다. 그 후 과오를 저질렀으나 짐은 예전처럼 받아줬다. 나라 풍습은 삭발을 금기하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했으나 짐은 부당하나 포용하여 폐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우라나라 씨가 무슨 ‘과오’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고 어떤 일 때문에 갑자기 삭발했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황후가 삭발했다는 것에 대한 민간에서 떠도는 풍문도 엇비슷하다. 건륭제가 남순할 때 항주에 다다른 후 가무와 여색을 마음껏 즐겼고 심지어 미복으로 출유해 밤이 깊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황후 우라나라 씨는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러 차례 고언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모욕만 당했다.

 

극도로 분노가 치밀고 절망을 느껴 삭발해 출가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우라나라 씨가 항주를 떠나지 않고 항주에 있는 모 사찰에서 비구니가 됐다고 하기도 한다. 고불에 청등(靑燈)을 밝히며 여생을 살았다고. 우라나라 씨가 삭발한 일 때문에 민간에서는 “머리카락 없는 국모”라고 불렀다.

 

황후가 삭발한 이유에 대해 야사에는 여러 판본의 견해가 전한다. 그중 하나는 건륭 30년 윤3월, 황제는 후궁 가려(佳麗), 황자 왕손 및 왕공 대신 등을 인솔해 황태후 니오후루 씨를 모시고 강남 일대를 순행했다.

 

만세야(萬歲爺) 일행이 항주에 다다랐을 때 황제가 서호(西湖)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한 후 소주와 항주가 역대로 미녀가 많은 지방임을 떠올리고 어찌 음미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했다. 그래서 변장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심복 태감 두 명을 미복시켜 따르게 해 호수 기슭으로 구경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남순을 따라 갔던 우라나라 황후가 알게 됐다. 황제의 면전에 엎드려 울면서 간곡히 말렸다. 황제는 국가대사가 막중하고 용체가 중하니 밖에서 기생을 데리고 놀며 체통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

 

하지만 건륭제가 어찌 귀에 거슬리는 간언을 듣겠는가. 대노해 황후가 정신병이 들었다며 책망하고 사람을 불러 황후를 먼저 도성으로 보내라 명하고 궁에 연금시켜 버렸다는 얘기다.

 

이외에, 우라나라 황후는 폐위된 후 의기소침하게 되고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아 황궁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결연히 스스로 삭발해 비구니가 됐다는 판본도 있다. 항주의 모 사찰로 들어가 부처를 모시며 절간의 새벽종과 저녁 북소리 속에서 은둔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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