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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회] 귤림서원과 제주성지 주변 산책 ... 역사성 교육의 장소

 

오현단 주변인 이곳은 귤림서원이 들어서기 전에는 남수각을 자연해자로 하는 제주성지였다. 탐라시대의 고성 터가 바로 여기일 것이다.

 

여러 기록에서 보면 탐라국 시대의 고성은 북으로는 해안을 끼고, 동성은 산지천 서안을, 서성은 병문천 동안을 각각 경계로 삼아 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관덕정이 있는 제주목관아지 주변과 더불어 역사 표지석과 안내판이 많은 곳이다. 그만큼 우리의 역사성을 키울 수 있는 소중한 교육의 장소이기도 하다. 다음은 제주성지 주변에 세워진 표지석과 안내판의 내용이다.

 

제주도 기념물인 제주성지

 

제주목의 치소(治所)를 둘러쌓았던 성터로 오현단 남쪽에 그 일부가 복원되었고, 곳곳에 그 잔해가 남아 있다.

 

성의 규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둘레 4394자, 높이 11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여러 차례 증축과 퇴축이 있은 후의 둘레는 6120자, 높이가 13자로 각각 불어 나 더욱 높고 견고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증축과 퇴축이 이루어진 이유는, 성안에 물이 없어 백성들의 고통이 많았고, 가락천과 산지천이 자주 범람했기 때문이다.

 

1565년(명종 20년)에 목사 곽흘이 성을 산지천 밖으로 물려 쌓았고, 1599년(선조 32년)에는 목사 성윤문이 성을 5자 더 늘려 쌓고 각 성문 위에 망루를 세우는 한편, 남북의 두 수구에는 홍예(虹霓)모양으로 남수각과 북수각을 설치하였다.

 

또 성 남쪽에는 제이각을 세웠으며, 성 위에는 적대(敵臺)와 포루(砲樓)가 설치되었다.

 

그 후 1652년(효종 3년) 8월에 큰 비바람으로 남북 두 수구가 무너지자, 목사 이원진이 그해 겨울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봄에 완성하고 북수구 위에는 정자를 세워서 공신루(拱辰樓)라 하였다.

 

그러나 큰 비가 내릴 때마다 산지천이 범람하여 민가가 침수되므로 1780년(정조 4년) 김영원 목사가 물난리를 피하고자 옛 성터를 따라 길이 551보, 높이 9자의 간성(間城)을 쌓아서 그 폐해를 방지했다.

 

이 간성에는 남북에 두개의 문을 개설하여 남문을 소민문(蘇民門), 북문을 수복문(受福門)이라 하였다.

 

1847년(헌종 13년) 봄에는 이의식 목사가 북수구의 성을 쌓아서 성 위에 천일정(天一亭)을 세웠고 또 간성도 더 쌓았는데, 이 때 수복문을 중인문(重仁門)이라 하여 현판을 바꾸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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