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장학량(張學良, 1901년6월~2001년10월), 자는 한경(漢卿), 호는 의암(毅庵), 어릴 적 이름은 쌍희(雙喜). 한족으로 본적은 요녕성 반금(盤錦)시 대와(大洼)현 동풍(東風)진이고 요녕성 안산(鞍山)시 태안(台安)현 환동(桓洞)진 악가촌(鄂家村) 장가와보둔(張家窝堡屯, 옛 명칭은 상자림첨가와포[桑子林詹家窝鋪])에서 태어났다.

 

국민혁명군 고급장교다. 봉계(奉系)군벌 수령 장작림(張作霖)의 장자다. 1920년 동삼성육군강무당(東三省陸軍講武堂)을 졸업하고 봉계군벌에서 요직을 역임하다 ‘황고둔사건(皇姑屯事件)’이후 동북보안군총사령을 계승해 일본군의 포섭을 거절하고 “동북의 기치를 바꿔” 중국 통일에 공헌을 하였다.

 

나중에 중화민국 육해공군 부사령, 육군 일급상장을 역임하였다. 서안사변(西安事變) 이후 장개석(蔣介石) 부자에게 장기간 연금되었다. 1990년에 신체의 자유를 얻고 1995년에 대만을 떠나 미국 하와이로 이주했다가 2001년 10월 14일에 호놀룰루(Honolulu)에서 별세했는바 향년 101세였다.

 

장학량은 항일을 주장하고 내전을 반대하다가 일찍이 양호성(楊虎城) 장군과 함께 세상을 놀라게 한 ‘서안사변’을 일으켜 제2차 국공합작을 이루어냈다.

 

장학량은 풍운아다. 일생동안 겪은 천양지차의 기복은 근대사에서 거의 유일하다 할 것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일만의 군사를 거느렸다(년소만두무:年少萬兜鍪)." 27세 때에 부친 장작림(張作霖)의 ‘동북왕(東北王)’ 권력의 보도를 이어받았다. 당시에 이미 사라진 세습방식으로, 많은 사람들과 권력을 다투면서 남들이 일생동안 누려보지 못한 독립왕국을 세웠다.

 

이후 10여 년 동안 득의양양했다. 군사 방면과 정계에서 정권의 잘잘못을 논하면서 풍운을 몰고 다녔다. 어떤 때는 일국의 원수 장개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창 나이인 36세 때 ‘서안사변(西安事變)’으로 장개석을 항일전선으로 끌고 가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휘황찬란했던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리고 장개석 부자에 의해 수금되면서 50여 년 동안 ‘좌정관천’의 생활을 한다.

 

분기점이 된 ‘서안사변’이란 무엇인가? 1936년 12월 12일, 공산군 토벌을 위해 섬서(陝西)성 서안(西安)에 주둔 중인 장학량 휘하의 북동군이 남경(南京)에서 독전을 위해 건너온 장개석을 감금하고 국공 내전의 정지와 거국일치에 의한 항일투쟁을 요구한 사건이다.

 

장개석(蔣介石)도 일대의 효웅이다. 세가의 ‘귀공자’ 출신으로 하늘까지 다다랐던 장학량과는 달랐다. 풀뿌리에서부터 일가를 이루었다. “누더기 옷을 입고서 허술한 수레를 끌며 산림을 개척했다.” 자수성가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장개석은 자기 앞길에 누가 되는 인물이나 정적들에 대해서는 아량을 베풀지 않았다.

 

장학량이 유일한 예외였다. 평생 구금은 됐지만 목숨은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학량과 함께 ‘서안사변’을 일으켰던 주역인 양호성(楊虎城)은 수금됐다가 형세가 불리해지자 어떤 유예도 없이 주살해 버렸다.

 

군통(軍統, 국민정부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 핵심 간부가 술에 취해 회고하면서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대립(戴笠)이 장학량이 생활하는데 비교적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다. 양호성은 장개석이 유별나게 싫어했다. 끝까지 외부와 접촉을 하지 못하게 했다. ……새 솜옷으로 바꾸기를 원했으나 그것조차 허락이 되지 않았다.” 장개석의 수긍이 없었다면 어찌 대립이 장학량에게 ‘은혜’를 베풀 뱃심이 있었겠는가.

 

장개석은 하극상을 범하면서 자신을 연금한 장학량에 대해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평생을 구금한 것을 보면 그 일면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한이 그리 심했으면서 어찌 그나마 관대(?)하게 처분했을까? 끝내 목숨을 살려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개석이 ‘아량이 넓어서’거나 ‘민주’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장학량은 장호성과 같은 부류와 다른 점이 있었다. 장개석에게 3가지 은혜를 베풀었다. 은정이 한없이 크다고나 할까. 장학량이 없었으면 장개석의 화려함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장개석의 화려한 시절 ‘영수 생애’은 장학량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고 성패를 가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첫째, 동북지방의 기치를 바꿔 장개석의 전국 통일을 도왔다.

 

장개석은 일생동안 스스로 긍지를 느끼는 두 가지 공적이 있다. 첫째, 형식상이나마 전국을 통일했다. 둘째, “천번 만번 불러서야 겨우 나와(千呼萬唤始出來)”, 수줍은 듯이 어쩔 수 없이 항일 전선으로 나갔다. 왕정위(汪精衛)와 같이 지위도 잃고 명예도 땅바닥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 두 길을 걷고 난 후, 장개석 개인은 한 지역의 황포군관학교 교장이라는 미미한 신분에서 당시 전 세계적인 중국의 유일한 영수로 발돋움했다.

 

“때가오니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하였다(時來天地皆同力)”, 장개석의 두 가지 공적도 그를 도왔다. 중국의 항일전쟁은 팔로군과 제4군이 적의 후방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것 이외에,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동북지방에 출병하자 일본 천황이 투항을 선포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장개석은 “중국을 이끌어 항전에서 승리했다”는 영예를 얻게 된다.

 

북벌의 시기는 두 시기로 나뉠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중공과 소련의 도움아래 장개석이 북벌을 단행해 외진 광주(廣州)에서 단번에 장강까지 진출했던 시기이고 ; 둘째 시기는 북벌이 북경에까지 이르렀을 때이다. 그러면서 당시로서는 가장 강했던 동북 군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장작림의 수중에서 막 정권을 이어받은 장학량이 갑자기 주동적으로 다가왔다.

 

1928년 12월 29일, 장학량은 전국에 “동북지방이 기치를 바꿨다”고 선포했다.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의 국민당 정부에 복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장개석에게 복종한다는 말과 같았다.

 

장개석은 총 한번 쏘지 않고 당시 가장 발달한 동북지방을 손에 쥐면서 국민당 명의아래 국가 통일을 이루었다.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송태조가 천하를 통일했던 불세출의 공로를, 장개석은 순식간에 얻게 된 것이다.

 

만약 장학량이 주동적으로 기치를 바꾸지 않고 오패부(吳佩孚), 손전방(孫傳芳)처럼 저항했다면 승패는 말할 필요도 없고, 장개석은 최소한 수년의 시간이 필요했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있던 동북 군벌을 그리 쉬이 접수할 수 있었겠는가. 만약 장학량이 일본과 연맹을 맺어 자신의 안전만을 추구했다면 결과는 쉬이 예측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장개석은 장학량이 대대적으로 베푼 은혜에 대해 감격해 하면서 그를 동북 변방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편제를 바꾸기는 했으나 동북지역의 군대를 그대로 장학량의 휘하에 남겨뒀다. 당연히 동북지방의 천리강산은 장학량이 손아귀에 있었고.

 

그때 장학량의 나이가 27세였다. 장개석 휘하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동년배들이 중대장 급에 있으면서 막 기지개를 펴고 있던 그런 나이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