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도전 끝에 얻은 영광이다. 2012년 야권 경선에 도전했지만 거함 김우남 의원의 장벽에 가로막혀 끝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절치부심 4년의 세월을 보냈다. 차근차근 준비했다. 기본부터 다시 다졌다. 주위 인맥을 다시 차근차근 훑었다.
20대 총선 본선에 앞서 4선 고지를 넘나보는 김우남 의원과 다시 맞붙었다. 고작 0.6%포인트 차였고 표론 고작 16표였다. 하지만 그 여론조사 경선에서 이겼다.
만 48세의 나이. 제주 을 선거구에서 당선의 영예를 안은 더민주당 오영훈은 집념의 인물로 꼽힌다.
서귀포 남원에서 태어나 서귀고를 나온 그는 제주대 경영학과 재학 시절 그를 도의원으로 만들어준 제주시 일도동에서 내내 생활했다. 동가숙 서가식하던 청년기였다.
대학에 진학, 사회에 눈을 뜬 그는 학생운동으로 눈을 돌렸다. 불의에 눈을 감을 수 없었던 이유 때문이었다. 1990년대 초반 제주대 학생운동을 이끌었고, 그리고 제주대 총학생회장으로 이름 꽤나 알렸다. 하지만 부모에겐 퍽이나 걱정을 준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는 2006년 제주도의회의 문을 두드렸다. 보기 좋게 당선됐다. 여세를 몰아 8, 9대 의원을 내리 지냈다.
파죽지세로 주가를 구가하던 그는 2012년 19대 총선에 도전했다. 하지만 경선의 문턱에서 그는 좌절했다.
잠시 당을 떠나기도 하고, 안철수 그룹과 몸을 섞어보기도 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그룹에 발을 담그며 다른 정당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제지미래비전연구원을 만들어 착실히 제주의 미래 청사진을 그리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16년 총선에서 그는 다시 고향의 품으로 돌아갔다. 분루를 안겼던 김우남 의원과 재대결을 펼쳤고, 본선에 진출했다.
하지만 그의 묘한 당적 이탈 행동에 의문을 가졌던 당내 인사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비록 간발의 차이로 이겼지만 김우남 의원 측도 승복하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고 중앙당은 오랜 시간을 끌더디 김종인 대표의 당무거부 사태가 끝나자 그의 공천을 확정지었다. 그나마 막판 김우남 의원이 도당 총괄선대위원장으로 합류, 그를 돕기 시작하면서 위안이 됐다.
본선에서 만난 새누리당의 부상일 후보.
세 번째 도전에 나선 검사 출신 상대의 질풍노도는 만만찮았다. 투표 직전 나온 여러 차례의 여론조사에서도 그는 부상일 후보를 단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미묘한 낌새는 감지됐다. 여론조사를 하면 할 수록 지지율 격차는 줄었다. 맹추격이었다.
그러나 선거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했다. 아직 덜 좁혀진 상태에서 그 정도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오죽하면 투표 직후 나온 방송3사의 출구조사에서도 승리의 여신은 부상일 후보 측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기다렸다. 시소게임을 하듯 엎치락 뒤치락 개표결과는 역전에 역전을 반복했고 승리의 여신은 마지막 그에게로 기울었다.
그는 투표 전날인 12일 제주시민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시장에서 나물을 파시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할머니, 아침 새벽 용역 일을 위해 출근하는 형과 동생들, 농산물 가격 하락과 재해로 시름하는 농업인, 헬조선에 태어나 고생하는 청년 등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선이 확정되던 날 13일 오영훈 당선인은 “오늘 저는 깨어있는 제주시민의 위대한 힘을 보았다. 오영훈의 승리는 평소 깨끗한 정치를 염원하는 위대한 유권자의 승리다. 그리고 구태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제주의 정치를 실천하라는 위대한 제주시민의 명령"이라고 북받치는 감정을 표현했다.
그는 이어 "지금부터 저는 당선자 신분으로서 제주의 현안과 갈등을 해결하는데 적극 앞장설 것이다. 아울러 약속한 대로 선거 기간 동안 일어났던 여러 갈등을 풀고 화해와 상생의 정치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떨리듯 말을 맺었다. [제이누리=양성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