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평리 애향탑과 충혼비
이 탑은 온평리분들이 1981년도에 마을길 포장을 기념하여 세웠다.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말 그대로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이제까지 나들이 중 애향탑을 본 건 온평리가 처음이다. 이런 자부심 가득한 마을에 공항건립으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온평리 충혼비는 애향탑 바로 옆에 세워져 있다. 6.25전쟁동안 전사하신 이 마을 출신 군인 21분과 경찰 세 분의 넋을 기리고 위안코자 마을 주민들이 1963년도에 세웠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육지부만의 일이 아니었다. 4.3의 아픔을 겪자마자 육지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내던져진 우리 제주 청년들은 그렇게 모진 세월의 한 가운데 서 있었던 것이다.
충혼비 바로 옆엔 백년해로나무라고 이름지어진 팽나무와 후박나무가 하나가 된 연리목이 서있다. 사진으로 볼 때 나무의 잎이 다름을 확연히 볼 수 있다.
여기서 기도하면 득남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기도하는 이를 볼 수가 없으니 요즘은 딸이 대세인게 맞나보다.
서동 마을길가 어느 돌담에 오래된 동백나무 하나가 보인다. 여느 동백나무와 다르다. 속이빈 밑둥치 속에선 대나무가 자라고, 두갈래로 뻗은 굵은 가지는 돌담석을 꽈악 품고있다. 돌담석은 동백가지의 속살을 파고 들었다. 동백은 그렇게 대나무와 돌담석을 품고도 무성하고 짙은 이파리를 간직하고 있다. 해마다 짙 붉은 꽃망울도 피워내고 있을 것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때만 해도 제주시가지 내에 화장실(통시)에 돼지를 키우던 곳이 꽤 있었다. 관덕정 바로 앞에 있던 우리집에도 70년대 초반 초가집이었을 때 돼지가 있었다. 그나마 재래식 화장실 밑에 돼지가 살고 있는 형태인데 여기에 그런 통시가 있다. 원래 시골의 옛 통시는 가림벽도 지붕도 없이 돼지 울 한켠에 댓돌 두개를 걸쳐 볼 일을 보았다. 물론 돼지를 쫓는 작대기 하나는 필수였다. 벽과 지붕이 있는 통시가 있는 이 집은 그래도 동네에서 꽤 잘 나가던 집안이었을 것이다.
온평리 마을은 여느 동네와 달리 마을 길이 넓다. 또한 들어선 집들도 대체로 넓은 대지를 가지고 있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예전부터 온평리가 아주 잘 사는 마을이었다는 뜻일거다. 평지가 많은 곳이라 애초에 집터를 잡을 때 널찍하게 잡았는지도 모른다. 마을정경이 시원시원한게 여느 제주 마을과 확연히 다름은 필자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부지런히 어선이 드나들었을 포구엔 레져용 배 몇척만이 매여져 있다. 흔한 갈매기 하나 안보이니 먹을게 나올 구석이 없나 보다. 바다는 짙푸르고 하늘은 파랗다.
벽랑국 세 공주를 모시고 온 거북이가 온평리가 좋아서 머물고 있다는 전설이 있는 거북바위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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