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최초의 염전, 최대의 소금 생산지 ... 종달리

  • 등록 2020.05.14 1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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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욱의 [제주역사나들이](42) ... 9차 종달리 탐방코스 (4)

■종달리

 

원래 종달은 종다릿개[終達浦]라는 이름에서 한자 차음한 것으로 보인다. 깨달음에 다다랐느니 제주땅 끝에 달했다느니 하는 말이 있는데 믿을게 못 된다고 본다. 아무렴 어떤가.

 

19세기 중반까지는 정의현 좌면에 속했다. 지금으로 치면 서귀포 소속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북제주군 구좌면과 구좌읍에 속하였고 2006년 7월 제주특별자치도 출범과 함께 북제주군이 없어지면서 제주시에 편입되었다.

 

제주에서는 비오는 날이 많아 육지에서와 같이 천일염을 생산하기가 어려워서 역설적으로 소금이 귀했다고 한다.

 

종달리는 과거 제주에서 최초로 염전이 만들어진 최대의 소금 생산지였다. 종달리 사람들을 '소금바치'라고 불렀다. 사람들의 신분이나 직업등에 따라 붙는 접미사가 꽤 있다. '-바치', '-아치'도 마찬가지다. 가죽을 다루는 사람을 '갖바치'라 부르듯 종달리 염전 사람들을 '소금바치'라고 불렀던 거다.

 

그 만큼 많은 양의 소금이 이 곳에서 났다는 건데 지금은 마을회관 앞 소금밭 전시관이 그 흔적을 대신할 뿐이다.

 

종달리 소금은 마을 앞 드넓은 모래펄이 있어서 가능했다. 1900년대 초 종달리 마을 353호 가운데 160명이 소금 생산에 종사했고 소금을 생산하는 가마도 46개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지형적 특성상 만입부에 넓은 모래펄이 발달하여 염전 조성이 유리하고, 또한 근처에는 지미봉·두산봉 등 오름들과 야산이 해안에 인접해 있으므로 쉽게 연료(땔감)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드넓은 소금밭은 1957년부터 1969년에 걸쳐 시행된 간척사업으로 사라진다.

 

 

1914년도 종달리 부근 지적도를 통해 일일이 지번을 확인해서 해안선을 파악해 보았다. 놀라웠다. 노란색으로 표기된 부분이 바닷물이 드나들던 모래펄이었고 지금은 매립되어 경작지로 되있는 곳이다.

 

지금의 종달리 마을은 다른 마을처럼 해안선을 따라 가옥이 들어서 있었다. 간척사업때문에 결과적으로 내륙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종달리 앞바다엔 썰물 때는 건너갈 수 있는 섬이 세개나 있었고 농사를 지었다. 서쪽의 섬엔 집들도 있었다. 그 때 모습이 더 장관이었다고 본다. 아쉽다. 그 때 논으로 간척된 땅의 상당수가 갈대밭으로 변했다. 논농사가 마땅치 않았던거다. 나록을 생산해 보려는 당시의 절박함이 이해되나 지금의 관점에선 탑동 매립으로 잃어버린 제주시 탑아래 해안가 만큼이나 아쉽다.

 

 

직선으로 뻗은 길은 간척지임을 짐작케한다.

 

 

 

간척지의 논이었던 곳은 갈대만이 무성하고, 밭으로 쓰기 위해서 다시 성토를 한 땅엔 작물이 자란다. 우영밭 한 뙤기라도 소중히 가꾸었던 제주인데 상당히 많은 면적의 땅이 갈대 숲으로 방치(?)되어 있어 궁금증이 인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철새도래지와 연결된 간척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곳에 소위 노는 땅이 많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종달리의 마을 안길은 하도리와 또 다르다. 곳곳에 집으로 향한 올레가 긴 곳이 많다.

 

 

 

한여름 마을 어르신들은 나무그늘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받고 장군멍군 하셨을 테고, 맞은편 점빵엔 동네 아이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을 것이다. 어릴 때 우리동네도 저런 집에 점빵이 있었다. 뽀빠이는 10원, 자야는 20원이었다. 얼음을 담은 고무로 된 풍선처럼 생긴 주머니를 넣은 사각통안의 아이스께끼는 지금도 그립다.

 

 

 

늦가을 언저리에 핀 분홍 애기동백꽃에 철모르는 벌이 한마리 앉아 있다가 폰 카메라를 들이대니 훌쩍 날아가 버린다. 이 계절에 벌이라니. 부지런한건지 무모한건지 모를 일이다.

 

 

늦가을의 종달리는 겨울채비를 한다고 동네 여기저기 앙상한 폭낭 가지가 말해준다.

 

 

 

종달리 마을 안길엔 옛집을 개조한 작은 가게들이 많다. 주인장의 센스가 돋보이는 가게들인데 아마도 젊은 외지인들 같다. 제주의 작은 마을이 이렇게라도 활력이 생기는 모습이 긍정적으로 보인다.

 

 

이와는 반대로 종달리 마을 안엔 빈집이나 빈 집터가 유독 많다. 제주의 다른 시골 마을도 그렇긴 하지만 여기는 더 많이 눈에 띈다. 이곳에 새 보금자리를 트는 이들이 많아져 마을이 활기차게 북적거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돌담(축담)으로 지어진 여느 집들과는 다른 집이 눈에 띈다. 안에서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이 집은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일본식 미장으로 마감한 집이다. 일명 아라이다시 (洗い出し, 세척노출미장)공법이다.

 

지금은 이 공법이 가능한 기술자도 드물다.

 

이 건축마감으로만 보아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당시엔 동네에서 꽤 고급이었을 이 집도 주변의 돌담집과 함께 늙어 간다.

 

눈으로 종달리 마을을 호젓하게 걸어보자.

 

 

 

 

 

 

 

 

 

 

 

 

담쟁이도 늦가을엔 빨간 단풍이 곱게 든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게 전부가 아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두고 볼 일이다. 결국엔 고운 빛깔을 보이니.

 

 

 

■엉물/청강사

 

 

청강사 대문 옆에 자리한 산물(용천수)이다. 여기도 길 건너편은 간척지이다.

 

예전엔 종달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식수원이었다. 안타깝게도 세월은 이 달고 찬 맑은 물을 여느 연못처럼 탁하게 바꿔 버렸다.

 

 

엉물을 맑은 강처럼 여겨 청강사라고 지었을까.

 

절의 기원은 자료부족으로 알 수 없지만 종달리의 생명수인 엉물을 보듬고 있는 절이면 꽤나 유서 깊을 듯 하다.

 

■종달리 패총4지구

 

도로로 편입된 종달리 1838-3번지 일대이다. 2000년 7월 발굴 조사를 통해 토기류, 청동구류 등 5~6세기 탐라국 시대의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곽지패총에서는 고동류가 80%이상인 반면 이곳에선 내만성 조개류가 80%이상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는 지금과 달리 내만이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는 증거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특히 산지천에서 발견된 화천(貨泉:기원전후 발행된 중국 엽전)이 이 곳에서도 발견되어 당시 제주도 내외의 문물 교류를 짐작케 해준다고 한다. 아직도 옛날 조개류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 2000년의 세월을 마주한다.

 

 

땅을 메우고선 네땅 내땅의 구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돌담을 쌓았다. 허나 지금은 애써 메운땅은 버려졌고 새들과 바람은 구분없이 이쪽 저쪽을 드나든다. 경계를 두는 건 인간의 일이다. 이 돌담은 세월과 자연 앞에 인간의 덧없는 마음을 말해준다.

 

 

출발지인 금붕사로 돌아왔다. 지미봉 잠깐 오르는 일도 산행이라는 듯 적응 안된 다리가 무겁다.

 

가을이 끝나간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오현고를 나와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육군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삼성물산 주택부문에서 일했다.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에서 건축공부를 더 한 뒤 에이스케이 건축 대표이사를 거쳐 제주로 귀향, 현재 본향건축 대표를 맡고 있다. 제주대 건축공학과에서 건축시공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고향 제주의 벗들과 제주의 역사공부를 곁들여 돌담·밭담·자연의 숨결을 더듬고자 ‘역사나들이’ 기행을 나선다.

 

 

 

김승욱 kswinn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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