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등포
행원의 옛 지명인 어등포는 제주도 북쪽에 있는 다섯 개의 연륙 포구 중 하나였다. 또한, 그 당시 별방 방호소 소속 전선 1척과 함께 병선도 감출 수 있다고 하였으니 꽤 큰 포구였던 셈이다.
광해군이 유배를 온 곳이라 해서 어등포라 불렸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틀린 듯 하다. 제주에 올 때 이미 임금이 아닌 죄인 신분으로 왔고 지금까지 복권도 되지 않아 군(君)으로 불리는 신분인데 누가 감히 임금 어(御)를 쓸 수 있었겠는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는 강화도로 유배되어 아들 내외의 비참한 죽음을 보았고, 삼전도의 굴욕적인 소식도 들었을 것이다. 그 때 광해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어쩌면 중립외교를 펼치며 후금(이후 청나라)과 화친을 했던 터라 청에 의한 복권의 희망도 가졌을 듯 하다. 그러나 인조는 삼전도 굴욕이 있고난 직후 그 해인 1637년에 돌연 광해를 제주로 유배 보낸다. 인조도 그러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일까. 광해는 1641년 끝내 절해고도 제주에서 한 많은 67년의 생을 마감한다.
이증(李增)의 남사일록(南槎日錄) (1679년)에서는 어등포(於等浦)로 표기되어 있고, 신광수의 탐라록(耽羅錄)(1764년)에는 ‘어등포(魚登浦)의 저녁 모습’은 제주 8경(濟州八景)의 하나라고 하여 어등포(魚登浦)로 표기하고 있다.
어찌됐건 어등개라고 불리던 지명을 한자 차음한 것이 어등포인 셈이다. 애향심의 발로에서 나온 이야기에 찬물을 끼얹은건 아닌지 괜한 걱정을 한다. 포털 싸이트 지도 검색에는 어등포를 검색하면 식당이름만 나오는데 이부터 고쳐야할 일이다. 구좌읍 방파제로 검색해야 어등포가 나오니까 말이다.
■월정리 마을 안길
어등포를 뒤로 하고 출발지점으로 향한다. 세찬 바닷바람을 마주하고 걸으니 발걸음도 무겁고, 얼굴이 소금 범벅인듯 짠내가 물씬 묻어난다.
서둘러 관광객들과 차들이 뒤엉킨 월정리 해변을 지나 다시 마을 안길로 들어서니 바람이 확실히 덜하다.
■월정리 해신당
해신당으로 향하던 길에 거센바람을 마주보고 낚시하는 이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팔뚝만한 숭어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다. 제주에선 해안가의 수심이 낮아서, 바람이 세고 파도가 많이 치는 날 큰 고기가 올라 온다던데 그 말이 맞는듯 하다. 초보낚시꾼인 나들이객은 엄두도 못 낼 날씨에 역시 꾼은 꾼이다.
월정리 해신당은 벨롱개 해신당이라고도 한다.
정월 또는 2월에 마을제와 같이 제를 지낸다고 하며 개인 치성은 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바다가 삶 터였던 제주에서는 해상의 일들을 관장하는 해신은 절대적이다. 옛 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곳에서 제를 지내며 해상의 안전과 풍어를 간절히 기원했다.
마을에 따라서는 마을 전체의 수호신을 모시는 본향당과는 별도로 해신당 계통의 당이 따로 있는 곳도 있고, 또 본향당이 따로 있지 않고 해신당 계통의 당신을 마을 전체의 본향당신으로 모시는 마을들도 있다고 하는데 월정리는 김녕과 마찬가지로 본향당이 따로 있다.
월정리 해안에도 어김없이 환해장성과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자꾸만 훼손되어져가는 환해장성의 체계적인 보호가 절실하다.
약 10km여의 나들이의 끝에 출발지로 복귀했다.
서걱거리며 귓속에 들어온 모래를 새끼손가락으로 털어내면서 월정리에선 용암동굴이나 내 귓속이나 바람이 실어온 모래에 영향을 받는건 매한가지구나 생각했는데 실없다.
바람 많이 부는 날 월정리는 귀마개라도 해야할 일이다.
지금까지 제주역사나들이 7차 탐방기였습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