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턴 항구 해변에서 항법장치가 고장난 거대한 유조선이 백사장에 올라와 앉는 황당한 사건을 시작으로 모든 인터넷은 물론 TV, 전화까지 불통되는 ‘중세시대’로 돌아가자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와 클레이(에단 호크 분) 부부는 별수 없이 와인을 마시며 ‘젠가(Jenga)’라는 보드게임을 한다.
젠가는 엄지손가락만 한 납작하고 작은 직사각형 나무 블록 54개를 한 층에 3개씩 놓아 18층 높이의 탑을 쌓아놓고 게임을 시작한다. 게임 룰은 간단하다. 번갈아 밑에서 아무 블록이나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빼서 위에 올려놓는다.
처음에는 밑에서 아무 블록이나 빼내어도 탑이 무너질 위험이 적지만 게임이 진행될수록 탑의 높이는 올라가지만 아래는 불안해지면서 점점 아래에서 블록 하나 빼기가 만만치 않아진다. 결국은 헐거워진 기반이 점점 올라만 가는 탑의 높이를 견디지 못하고 어느 순간에는 무너진다. 탑이 무너지는 마지막 블록을 움직인 사람이 패배란 쓴잔을 마신다.
아만다는 이미 상당히 위태로워진 젠가 탑에서 초집중한 끝에 블록 하나를 무사히 빼어 위태로운 탑 위에 역시 무사히 얹는 데 성공하고 의기양양해 한다. 이제 자기 차례가 된 클레이는 절망적으로 탄식한다.
그런 남편 클레이에게 아만다가 “내 삶의 기쁨은 당신을 괴롭히는 것”이라는 대사를 읊는다. 웃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왠지 ‘불편한 진실’을 담은 민망한 농담같이 들린다. 내(네)가 살면 네(내)가 죽고, 내(네)가 죽어야 네(내)가 산다. 모두 그렇게 평생을 매일매일 콜로세움에 선 검투사처럼 산다.
1938년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라는 네덜란드 역사철학자가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기보다는 그저 ‘놀고 유희를 즐기는 인간(Homo Ludens)’이라고 재규정했지만, 그 말도 정확하지는 않은 듯하다. 단순히 유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고 제압하려는 유희에 빠져든다.
몇해 전 짐 지그프리드(Jim Siegfried)라는 게임이론가가 인간을 ‘호모 루두스(Ho mo Ludus)’라고 새롭게 정의했다는데 하위징아의 정의보다는 그의 정의가 오히려 적절할 듯싶다. ‘루두스’라는 라틴어로 ‘시합’ ‘경기’라고 한다.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보드게임도 모두 예외 없이 ‘승패’가 있는 시합과 경기들이다.
아만다와 클레이 부부도 젠가라는 ‘유희’나 ‘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부부 사이에서도 상대를 이기려고 기를 쓰는 시합을 하고 있다. 시합 아닌 유희가 없고, 어떤 유희든 시합이 돼버린다. 시합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진학, 취업, 진급 등 경쟁적 관계 속에서 시합 아닌 것이 없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남긴 끔찍한 명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the war of all against all)’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삶 자체가 승패가 있는 시합이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에서 인간을 두려워하거나 혐오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마 아만다도 뉴욕시에서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광고마케터의 삶을 살면서 ‘인간 혐오증’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서양에 로마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Homo homini lupus, est)”라는 고약한 속담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늑대가 상징하는 것은 약탈적이고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모든 것이다.
이 속담은 매우 논쟁적이어서, 이 말을 둘러싸고 수많은 사상가, 종교인, 철학자들이 벌이는 논쟁이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인간은 동료에게는 늑대가 아닌 인간’이라고 반박하기도 하고. ‘야만을 벗어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에게 늑대가 아니다’라고도 한다.
19세기 독일의 인류학자이자 종교철학자이기도 했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란 말이 너무나 참담했는지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Homo hominus Deus, est)’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그의 「문명과 불만족(Civilization and Discontents)」에서 단호하게 결론 내린다.
“인간은 결코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고 공격받으면 피하거나 방어만 하는 젠틀한 존재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은 본성 자체가 공격적이어서 여건만 되면 이웃이 가진 것을 빼앗고 모욕하고 성적으로 착취하고, 이유 없이 고문하고 죽이고 싶어 하기도 한다. 세상을 경험했다면 어느 누가 감히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을까?” 읽어내리기 불편한 말들이다.
감독은 아만다와 클레이 부부가 젠가 게임을 하는 거실의 시계를 보여준다. 밤 11시가 됐다. 그때 문 밖에서 웬 인기척이 느껴지자 아만다가 긴장한다. 게임을 멈추고 클레이에게 몽둥이를 찾아보라고 한다. 사람의 기척을 느끼면 몽둥이부터 찾아야 하는 현실이 참담하다. 거실을 두리번거려 봐도 몽둥이로 쓸 만한 것이 없자 클레이는 길쭉한 조각 작품이라도 움켜쥐고 임전태세를 갖춘다.
정말 늑대가 나타났어도 아만다가 이토록 긴장하고 공포에 휩싸이지는 않았을 듯하다. 늑대가 아니라 인간이 나타났기 때문에 두렵다. ‘인간 혐오자’인 아만다는 포이어바흐보다는 프로이트를 신봉하는 모양이다. 지금 어떤 ‘이웃’의 어떤 ‘인간’이 ‘내가 가진 것을 빼앗고, 나를 모욕하고, 나를 성적으로 착취하고, 고문하고 죽이려고’ 나타났으리라고 느낀다. 아만다에게 인간은 늑대보다 더 두려운 존재다.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곳이라고들 한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모두가 ‘늑대’가 되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전방위적으로 인간 혐오가 확산하는지도 모르겠다. 늑대를 혐오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온갖 대상에 ‘극혐’ ‘개극혐’이란 말을 붙여 혐오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대상이 남아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온 과거의 특정한 어느 시대를 ‘야만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우리가 지금 통과하고 있는 이 시대보다 더한 야만의 시대가 있었을까 싶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