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발령이 尹 책임 아니다? 괴벨스 뺨치는 논법

  • 등록 2025.01.31 09: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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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10) 평범한 사람도 집단화하면
괴물 되는 이유 무엇일까 ... 초헌법적 비상계엄 발동
“책임 야당에 있다” 주장 ... 괴벨스 뺨치는 선전선동

아마도 미국을 혐오하는 어느 집단의 강력한 ‘전자기 펄스 폭탄(Electromagnetic Pulse Bomb)’ 공격쯤으로 짐작되는 테러를 당한 미국의 모든 인터넷 시스템이 붕괴된다. 전자기 폭탄의 충격은 인간들의 전자기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물에게 내재된 방향감각기능까지 교란한다. 

 

 

미국 남부 마이애미에나 있어야 할 플라밍고들이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의 수영장에 날아와 옹색하게 헤엄치고, 북부산림 속에 있어야 할 사슴 가족이 아만다의 펜션을 기웃거린다.

아만다의 펜션에 처음 등장한 3마리의 사슴 가족은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아만다의 가족도 정원에 나타난 사슴 가족을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숨죽이고 바라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가 수백 마리로 늘어난다. 진영을 갖춘 ‘사슴 집단’의 모습은 결코 사랑스럽지도 흐뭇하지도 않다. 그저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묘한 것은 사슴들의 ‘표정’도 처음 3마리였을 때와는 판이하단 점이다. 더 이상 조심스러워하지도 않고 인간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그 표정들이 뻔뻔하고 흉흉하고 공격적으로 바뀌어있다.

사슴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순하고 겁먹은 듯한 커다란 눈망울은 ‘집단광기(collective madness)’로 번질거린다. 에스마일 감독은 집단화한 사슴은 이미 사슴이 아닌 다른 무엇이 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만다는 ‘인간혐오자(misanthrope)’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심한 ‘인간에게 공포를 느끼는(anthrophobia)’ 인물로 그려진다. 밤 11시에 누군가가 현관문을 노크하면 반사적으로 몽둥이부터 찾는다. 

그러나 아만다의 ‘인간공포증’이라는 것은 인간 하나하나에 느끼는 공포가 아니라 집단화한 인간들에게 느끼는 ‘광장공포증(acrophobia)’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온갖 다양한 사람이 분주하게 오가는 ‘시장’에 공포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십만이 드넓은 광장을 꽉 메우고 머리끈 동여매고 붉은 깃발이든 푸른 깃발이든 하나의 깃발을 흔들어 대며 광기에 휩싸여 증오의 구호를 외쳐대면 공포스럽다. 

영화 속 집단화한 사슴 떼가 사슴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듯 하나의 ‘진영 집단화’한 인간들은 종종 인간 본연의 모습이 사라지고 통제불능이 된다. 잔에 담긴 물과 쓰나미나 홍수는 같은 물이지만 전혀 다른 물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The whole is greater than the sum of the parts)’는 의심스러운 말이 꽤 그럴듯하게 돌아다닌다. 이 말의 출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고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한 소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분명 “전체는 부분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부분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무엇”이라고 적었다. 부분들의 합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다.

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단순 오독誤讀했을 수도 있겠지만, ‘부분(국민 개인)’보다 ‘전체(국가)’의 위대함을 강조하려는 ‘국가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오독했을 것이란 의심을 지우긴 힘들다. 

개인적으로는 친절하고 예의바르기로 유명한 일본인들이지만 이 사람들이 뭉치면 친절과 예의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진다. 근면하고 성실하기로 이름난 독일인들도 한때 미치광이를 따라 전쟁에 열광하고 유태인 600만명을 불태워 죽이고 그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어 쓰는 괴물이 됐었다. 

메리 셸리(Mary Shelly)라는 18살 소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읽히지만, ‘부분들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란 명제로도 읽힌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살아있는 ‘인간의 장기들(부분들)’을 모두 모아 ‘새 생명(전체)’을 탄생시키지만 그 생명체는 사람이 아닌 괴물로 탄생한다. 훌륭한 장기들을 모두 모아놓았으면 엄청나게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할 텐데 그와는 반대로 최악의 괴물이 탄생한다. 평범하고 합리적인 사람들도 진영으로 집단화하면 괴물이 되기도 한다.

오래전 영화 ‘친구(2001년)’는 그 포스터가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같은 진영의 네 명의 친구가 눈에 힘주고 주먹을 쥐고 있는 포스터에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는 설명이 박혀있다. 빨간불도 서넛이 같이 건너면 두렵지 않다. 말이 안 되는 소리도 말이 되게 하는 것이 진영의 힘이다.

아닌 밤중에 5·18 이후 45년 만에 계엄령을 얻어맞고, 8년 만에 또다시 대통령 탄핵사태를 맞은 온 나라가 참담한데, 아무리 ‘내란 수괴’라도 결사옹위해야겠다는 진영의 광기가 무섭게 느껴진다.

진영논리가 발동하면 어처구니없는 비상계엄을 발동한 사람은 책임이 없고, 그가 비상계엄령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반국가적인 야당과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에게 책임이 있다는 논법도 가능해진다.

진영논리 마케팅의 최고봉이라 할 만한 히틀러의 선전선동부 장관 괴벨스(Goebbels)가 나치의 모든 침략전쟁과 인종청소 범죄를 솜씨 좋게 정당화한 것처럼, 우리의 내로라하는 정치인과 법꾸라지들도 계엄령을 정당화하는 참으로 ‘괴랄’맞은 선전선동의 논법들을 종횡무진 펼쳐놓는다. 
 

 

비상계엄이 결과적으로 실패했으니 처벌할 수 없다는 선전선동 논리도 등장한다. 괴벨스는 ‘집단선동의 공식’을 그의 최고의 어록으로 남긴 인물이다. “선동은 한 문장, 혹은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백가지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준비가 될 때면 대중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일단 진영에 속한 대중은 이미 어떤 ‘해괴한 소리’에도 선동당할 만반의 준비가 돼있다는 것을 괴벨스는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괴벨스와 같은 온갖 선전선동과 집단의 광기에 맞서서 광장에 등장한 ‘고양이 발 냄새 연구회’ ‘만두노총’ ‘살찐 고양이 집사 모임’ ‘걸을 때 휴대폰 안 보기 운동본부’ 등등 각양각색의 ‘가게 깃발’이 휘날린다. 광장의 깃발이 아닌 ‘시장의 깃발’들에서 뜻밖의 위안과 희망을 느낀다.

이 깃발들이야말로 광장공포증을 유발하는 진영집단의 광기를 거부하고 정신줄 꽉 붙들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판단을 하겠다는 선언처럼 보여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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