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가 사람 잡은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 등록 2025.02.07 13: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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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11)
나심 탈레브의 ‘블랙 스완’ ... 본 적 없는 예측불허 일 의미
블랙 스완과 다른 ‘그레이 스완’ ... 경험했지만 간과했던 일 뜻해
중국 기나라 프로 걱정러 ‘기우’ ... 영화 속에도 프로 걱정러 등장
비상계엄 사실상 그레이 스완 ... 계엄 경험하고도 대비하지 못해

아만다(줄리아 로버츠 분)의 가족은 주말 휴양지에서 인터넷과 TV, 전화, 전기 등 모든 유·무선의 ‘연결’이 예고 없이 순식간에 끊어지는 충격적인 사태에 맞닥뜨린다. 이를 ‘미증유(未曾有)’의 사태쯤으로 느낀 사람들은 충격과 혼란 속에 빠져 갈피를 잡지 못한다.

 

 

미증유의 사태란 이전에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영화 속 인터넷망의 붕괴는 미국사회에 한번도 없었던 일일까. 크고 작은 IT망의 교란 내지 붕괴 사태는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끊임없이 발생한다. 크고 작은 사이버 테러 사건도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한번도 없었던 사건인 것처럼 여긴다.

2001년 나심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라는 미국의 통계학자가 ‘블랙 스완 이론(Black Swan Theory)’을 발표했다. 그 이후 블랙 스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금융 시스템의 붕괴현상을 이르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블랙 스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자신이 아직 보지 못했거나 예상치 못했던 것일 뿐, 매우 드물지만 나타날 수 있는 사태를 의미한다. 반면, 이미 한번쯤 경험했고 그것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 위험요소를 간과한 탓에 사태가 터졌을 땐 그것을 ‘그레이 스완(Gray swan)’이라고 지칭한다.

영화 속 인터넷 시스템의 붕괴는 사실 그레이 스완이지 블랙 스완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설마’했던 일이 닥치면 그것을 블랙 스완이라고 시치미를 뗀다. 블랙 스완이라는 말로 자신의 무지와 무방비의 책임에서 도망친다.

1929년 ‘세계경제 대공황’ 사태를 겪었는데, 1987년 금융위기가 블랙 스완일 리 없다. 2001년 9·11 테러를 당한 미국이 영화 속에서처럼 사이버 테러를 당한다고 그것을 블랙 스완이라면서 엄살 떠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경제시스템의 붕괴는 위험요소를 간과한 탓에 나타난 그레이 스완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동남 해안에는 무려 25기의 원자력발전소가 게딱지처럼 붙어있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통해 세계는 그 재앙이 언제든 터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 세계 450개 원자력발전소 중 6개에서 대형사고가 터졌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복잡한 계산을 거치면 22.7년에 한번씩 세계 어디선가에서 대형 원전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그 계산법이 얼마나 과학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로또 1등 당첨 확률이 814만분의 1이고,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벼락 맞을 확률이 60만분의 1이라고 하니, 원전 사고 가능성은 무척이나 높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설마, 그럴 리가’라면서 참으로 담대하고 태평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신기하다.

기원전 700년쯤 중국 기(杞)나라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지도 모른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던 ‘프로 걱정러’가 있었다. 얼마나 심했는지 어떤 현자(賢者)가 나타나 ‘하늘이 기운으로 가득 차 있어 해와 달, 별이 절대 떨어지지 않고, 땅도 기운으로 뭉쳐져 있어 꺼지지 않는다’며 어리석음을 깨우쳐줬다고 한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기우(杞憂)’라는 말의 기원이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걱정에 여념이 없는 그를 ‘바보’라고 비웃었다지만 어쩌면 그 프로 걱정러가 현자였고 그를 타일렀다는 현자가 바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현자가 몰랐을 뿐, 그때도 거대혜성이 지구에 충돌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고, 진도 10쯤의 강진은 분명히 있었을 터다. 기나라 프로 걱정러가 걱정했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사태도 블랙 스완이 아니라 그레이 스완이었던 셈이다.

영화 속에도 ‘기우’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만다는 주말 식료품을 사러 간 마켓 주차장에서 웬 사내가 픽업 트럭에 생수를 비롯한 산더미만 한 물과 식품들을 싣고 있는 모습을 보고 기이하게 여긴다. 그 사내 대니(케빈 베이컨 분)는 기나라의 그 프로 걱정러처럼 스쳐 지나가는 풍문 하나를 듣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블랙 스완 사태에 대비해 비상물품을 구입하는 중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 그런 대니를 ‘또라이’라고 비웃지만 ‘초연결 사회’의 붕괴라는 블랙 스완은 마침내 나타난다. 정확히 말하면 블랙 스완이 아니라 그레이 스완이 나타났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최근의 난데없는 비상계엄령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블랙 스완이 나타난 것처럼 충격을 받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레이 스완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이미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시대에도 벌어졌던 일 아니었던가. 대통령 탄핵 정국 역시 7년 전에 이미 경험했던 일이다. 이번에도 설마가 사람 잡았을 뿐이다.

블랙 스완 이론을 정리한 탈레브 같은 최고의 이론가도 블랙 스완 사태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블랙 스완 사태가 발생했을 땐 ‘블랙 스완을 희게 만들기(turn the Black Swan white)’ 위한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블랙 스완과 같은 사태가 터졌을 때 중요한 건 그 충격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복구 매뉴얼’이란 거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 시스템 사용설명서에는 블랙 스완 출현에 대비한 아무런 안내도 없었던 모양이다. 모두가 우왕좌왕한다. 오죽하면 법원에서 난동을 벌이는 사태까지 터졌다.

사실상 우리 정치가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던 사태라서 초유의 블랙 스완 사태가 아닌 그레이 스완 사태인데도 그 경험을 통해 마련된 대비책이나 시스템 복구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고 안타깝다. 

우리 모두 이번에 불쑥 터진 사태의 충격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충격과 피해를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듯한 오늘이다. 그래서 더욱 참담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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