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돌봐주시면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아들의 요청을 받고, 아버지는 주저 없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셨다. 물론 미국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신 아버지는 ‘자식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와버렸다’는 이웃 마을 사람을 만나보기도 하셨다.
“삼춘, 돈이 어시민 미국에랑 아예 갈 생각을 마십서!”라는 충고를 들었음에도,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미국행을 하셨다. 1987년, 한국에서는 한창 88올림픽을 준비하느라 온 나라가 들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65세, 어머니가 64세였다.
그즈음에 나는 부산에서 대학을 마치고 은행에 취업해 있었다. 딸을 만나보러 부산으로 올라오신 부모님은 며칠을 묵으시면서 국제시장과 용두산공원을 구경하시고, 자갈치시장에서 제주분들을 만나보기도 하셨다. 고국을 떠나기 전에 고향 분들을 만나셔서 그런지, 아버지 얼굴에는 어쩐지 깊은 시름이 어른거리는 듯하였다.
마침 영도 다리를 쳐다보시던 어머니께서 옛 추억이 떠오르셨는지 큰 목소리로 무거운 공기를 가르셨다. “아고게, 저 다리! 옛날에 나 밀포(해운대 옆 미포)서 물질헐 땐, 호루에 혼 번씩 가달(다리)을 올려서!”라고. “가달? 허허∼”하면서 아버지가 웃으시자, 어머니가 ‘이때다!’하고서 한 말씀을 더하셨다.
“밀포엔 아기업게(아기를 돌보는 계집아이)로 가신디, 물이 허리만도 못헌 디서 우미(우뭇가사리)를 캐곤테(캐길래), 나도 고치 해보쿠다(같이 해보겠다) 허멍 돌라붙언(달려들어서) 물질을 해수게. 아기 보는 것보단 하영(많이) 지칩디다만은, 재미는 이십디다. 자유도 있고, 물질도 배우고, 돈도 더 벌곡.....”
아, 유쾌한 어머니 덕분에 웃음을 되찾으신 아버지가 한 말씀을 하셨다. “정옥아, 미국으로 가기 전에 사진을 좀 찍어봐시민 좋키여!”라고. 우리는 당시에 유명세를 날리던 허바허바 사진관으로 갔고, ‘우리도 허씨’라는 아버지의 첫마디에 사진사는 ‘친척은 할인’이라며 ‘허허....’하고 웃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자의 독사진을 찍으셨고, 사진사의 반 값 권유로 예정에 없던 두 분의 단체사진도 찍게 되었다.

회고해 보니 그때로부터 38년이 흘렀다. 지난달에 어느 방송사에서 ‘휴먼 다큐’라는 주제를 내걸고서 어머니를 취재하였다. 그때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어머니가 묻는다. “이 사름은 누게니? 싸우지 안 해영, 서로 뵈리멍 웃엄져 이(싸우지 않고 서로 보면서 웃는구나)!” “게무로사(아무려면) 어머니, 아버지 얼굴을 모르시쿠과?” “게민, 니네 아방은 어디 가시니? 죽어시냐?” “천국 가셨지. 어머니가 이제 오나 저제 오나, 저 하늘나라에서 아침저녁으로 기다리고 계실 거우다!” 아, 나는 지금 ‘어머니도 어서 돌아가시라’는 악담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남편도 자신도 잊어버린 어머니가, 마치 고아처럼 어린아이 얼굴을 하고서 울먹거린다. ‘허태행씨는 나를 두고 어디로 갔나....’라면서.
아버지를 잊어버린 어머니는 당신의 생애 중 아버지와 함께 한 64년을 잃어버린 셈이다. 17세에 이웃집 18세 청년에게 시집을 가서, 81세까지 함께한 그 긴 세월을 말이다. 아니 엄격하게 말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어언 22년, 어머니가 이제는 103세가 되셨으니, 그동안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아온 세월을 더해, 86년을 동행해 온 셈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그 세월을 잊을 수가 있을까. 어머니의 생애에서 아버지가 안 계신 ‘나 홀로의 삶’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였을 터. 나를 잊어버린 삶이라면, 내가 없는 삶이나 마찬가지인 게다.

휴먼다큐를 촬영한 사진 감독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진에 AI를 투입해서 편집을 하였다. 긴장된 아버지의 얼굴이 아내를 사랑스레 바라보는 훈훈한 남편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렇게 행복할 수 없는 지아비의 얼굴이다. 사랑을 담뿍 받은 어머니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신부가 되었다. 그 사랑과 아름다움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가장 슬픈 건 잊어버리는 거’라는 방송작가의 멘트가 심금을 울린다. 나를 잊어버린 어머니의 표정이 무심해서 눈물이 솟구친다. 아, 이런 게 인생이라면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낫지도 싶다.
요즘 들어 어머니의 치매가 더욱 깊어졌다. 계속 배고픔을 호소하시니 어쩔 수 없이 음식을 자주 드리게 되는데, 그 때문에 변실금을 하게 되고, 기저귀가 감당하지 못한 대소변이 내복에서 빠져나와 이부자리를 적신다. 이불을 빨고 옷을 다 갈아입혀도 냄새가 방안 가득히 배어서 지독한 심술을 부린다. 악취를 내쫓기 위해 탈취제를 마구 뿌리는데,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 와서 문득 멈춘다. 우리 어머니께는 이러면 안 되는데....

어머니는 치매하는 시어머니와 시할머니를 온갖 정성으로 보살핀 효부가 아니신가. 한겨울에 보리검질을 매고 돌아온 저녁 시간, 시어머니가 옷·이불·벽에다가 분칠해 놓은 오물들을 누가 볼 새라 얼른 짊어지고서 바닷가로 달려가던 어머니. 용천수에 이부자리를 빠느라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면, 빨개진 얼굴 위로 허연 김이 솟구치며 눈가에 샘물을 만들어 내던 깊은 슬픔. 치매하는 시어머니가 발가벗고 이웃집 마당에 앉아 있단 소리를 들으면, 냅다 달려가서 이불에 덮어 싸고서 허겁지겁 업어오시며 무너지던 발걸음. 그 어머니를 난간에 내려놓자마자 얼싸안고 ‘걱정 맙서, 어머니. 이젠 우리집이우다!’라며 울음을 삼키던 어머니의 서러움이여.

이제는 어머니가 한밤중에 일어나서 방안을 맴돌다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현관을 잠그고 대문을 막아놓는다. 밤이나 낮이나 보이지 않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정옥아, 이레 와보라게!”하면서, 나를 찾는 어머니의 다급함이라니. 당신의 방, 이부자리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 방으로 나 데려다 도라게!’라며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 “어머니, 제발 정신 차립서!”라며 고함을 지르는 나의 불효막심함.
그래도 감사한 것은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어진 분이신지....’하는 추억이 내 가슴속에 믿음으로 자리하고 있음이다. 부디 어머니가 당신을 공개적으로 흉보고 있는 이 딸을 용서하시길, 치매로 고통받는 동료 노인들을 대신해서 관대하고 담대하시길 빌어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