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하루하루가 늘 봄날이 되게 하소서

  • 등록 2025.04.01 10:3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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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100세 일기] 고향 대포마을에서 보낸 어머니의 103세 생신

 

103세의 삶은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일까? 1923년 3월 22일은 어머니가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날이다. 100년을 넘게 살다 보면, 자식은 어머니의 생일을 잊어먹을 수도 있겠다. 2남 7녀나 되다 보니 나이가 80에 가까운 자식도 있고, 외국에 있거나 육지에 사느라 ‘보지 않으면 멀어지는’ 자식들도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그저 생긴 게 아님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하지만 자식을 이 세상에 보내놓으신 하나님은 결코 잊으심이 없으신가 보다. 지난 토요일 어머니의 생신날은 유난히 하늘이 해맑고 기온이 따스했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분홍색 코트를 입혀드리자, “오늘이 미신 날이니? 이추룩 곱닥헌 옷 입엉, 우리 어디 갈꺼니?”라고 물으신다. “어머니 인생 최고의 날이우다. 103세 생신이라 마씸. 오늘은 이 차 탕 대포로 가게마씸. 대포! 어머니 고향으로....” 어머니를 부축하며 외치는 언니의 말에, 어머니가 미안한 듯 혼잣말을 하신다. "백 설 넘은 늙은이가 생일은 미신 생일게... 호루 호루 살아지는 것만도 니네들한티 고맙고 미안헌디..." 어머니 얼굴을 보니, 정말로 미안하신 표정이다.

 

문득 요즘 노인대학 특강을 다니면서 만든 강의안 중 하나에, ‘오래 살면 행복할까?’라는 주제를 설정한 슬라이드가 떠오른다. 대문가에 앉아서 시름에 잠긴 듯, 외롭기도 한 듯이 바다를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사진이다. 그리고 옆에다 대문짝만하게 달아 놓았다. ‘오래 살면 생기는 문제: 경제적 어려움, 유병장수의 비극, 주거의 불편함, 누구와 살 것인가, 인지기능의 저하.’

 

특강이랍시고 고상하게 에둘러 표현해서 그렇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가난, 질병, 요양원, 외로움, 치매’로 요약된다. 딸과 함께 산다고 하지만, 어머니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시리라. 외로움이란 이 세상으로 떨어져 나올 때부터 운명지어진 삶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어머니는 대포마을에서 홀로 가장 오래 살아 계시는 어른이시다.

 

그래도 자동차를 타고서 대포를 향해 달리는 길에는 여행처럼 설렘이 실려 들어왔다. 예년보다 추운 탓에 늦어진 벚꽃들이 봉오리를 내밀고서 터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가지 끝이 불그스레 상기되어 있다. 길가에 저절로 피어난 유채꽃들이 정작은 정성들여 파종된 유채밭의 정품보다 더 야성적으로 고개를 내밀고 섰다. 바람을 무색하게 하는 꿋꿋한 표정이, 역시 바람 타는 섬 제주의 상징다운 들꽃의 본성을 드러낸다.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어머니가 한 말씀을 하신다. “유채는 보이는디, 보리는 다 어디 가고 어신고 이? 니네들한티 미안허고 서러운 것이, 그 추운 동짓덜에 밭고랑에 앉혀 놩(놓고), 그 고사리곹이 곱은(얼어서 굽은) 손으로 꽝꽝헌(딱딱한) 땅바닥을 조스멍(쪼으면서) 보리검질(김)을 매게 해신예게....” 그러자 언니가 큰 소리로 어머니를 편든다. “어머니, 그 시절은 우리만 아니랑 몬딱덜(모두들) 경 살아수게! 경해도(그래도) 우리는 어머니가 워낙 부진런허난 네(4) 고랑을 잡앙 걸질 매멍, 두(2) 고랑 잡앙 쩔쩔매는 우리한티 늘, ‘잘 햄져, 우리 똘들이 최고여!’ 허는 소리를 들어수게. 경 허멍도(그러면서도), ‘니네들은 부진런히 공부해영 후제랑 이 어멍추룩(어머니처럼) 검질 매멍 물질 허멍은 살지 말라, 이! 이건 사름이 헐 일이 아니여. 어멍은 배운 거 어시난 쇠추룩 일만일만 허멍 살암져만은(어머니는 배운 게 없으니까 이렇게 소처럼 일만일만 하면서 살와간다만은)....’ 허지 않으십디강? 경 허멍 우리들 모두 고등학교 마당에 보내주시난, 이추룩 어머니영 쉬멍 놀멍 살암수게!” 언니의 바른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가 웃으면서 한 말씀을 더 하신다. “그때도 우리 정옥이는 검질을 매당 뒤쳐지민, 막 울멍 그자 앞더레 돌아강. 저만이 혼자 앉앙 보지란이 골갱이로 땅바닥을 조삿주(정옥이는 김을 매다가 뒤떨어지면, 마구 울면서 그저 앞으로 달려가서, 저 앞에 혼자 앉아서 부지런히 호미로 땅바닥을 쪼았지)”.

 

그때는 그랬다. 학교는 간판으로 다녔고(부업), 밭일이 늘상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다. 다만 예외가 있었으니, 막내딸 정례만은 밭일도, 바다일도, 밤바르도 다 면제를 해주었다. 사랑은 또 사랑을 낳는다고. 그렇게 사랑을 받고 자란 정례가 오늘은 집들이를 한다.

 

마치 하늘의 축복처럼 우연히 ‘대포마을에 빈집이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보니, ‘바로, 그 집!’이더란다. 오랫동안 버려져서 허물어지고 낡아졌지만, 한 눈에 ‘고쳐 쓰면 대박!’이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지금은 교회와 아동센터를 운영하지만, 전에는 ‘창조기업’이라는 건축회사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

 

동생네 집은 우리에게 낯익은 골목에 있었다. 거기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이모님 집이었다. 대지가 70평이라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이 4개에 거실, 부엌, 창고까지 있었다. 갖출 것 있을 게 다 완비된 집이다. 볕이 잘 드는 방들은 오밀조밀 잘 가꾸어져 있고, 옥상에 올라가 보니 시원한 바다와 함께 제주국제컨벤션센터가 있는 관광단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제일 기뻐하셨다. 막내딸이 교회를 섬기고 이웃 아이들을 돌보느라 제 집도 없이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더니, 드디어 고향에 들어와서 기적처럼 집을 마련했으니 얼마나 좋으실까. 게다가 어머니 생신에 맞춰서 집들이를 하는 게 아닌가.

 

정례는 참 음식솜씨가 좋았다. 손맛은 타고나는 법이라고 하지만, 막내라서 밭일이 면제된 대신에 집안일로 일찌감치 훈련된 덕택이었다. 게다가 시어머니로부터 전라도 음식의 비법을 전수 받아 적용했으니, 맏며느리의 상차림이 얼마나 눈부신지. 주인공인 어머니 앞으로 생선회, 전복, 돼지고기, 잡채 등 평소에 식탐하는 음식들이 줄줄이 놓였다.

 

아, 그것은 막내딸만큼은 귀하게 키우고 싶다 하시며 우리처럼 들판과 바다에 데리고 가서 호미를 들게 하지 않으신 어머니의 전략적 결실이었다. 그것이 당신의 103세 생신을 이렇게 화려하게 수놓아 주실 줄을, 당신도 그때는 꿈꾸지 않으셨으리라. 아니, 딸 하나만이라도 그렇게 곱게 키워주고 싶었던, 모든 딸을 향한 사랑이 어머니의 생신상을 저리도 풍성하게 만들어 놓았으리.

 

곱디고운 케이크에 여린 초를 다섯 개 꽂고서, 우리는 다 함께 노래를 불렀다. ‘사랑하는 김성춘 어머니의 103세 생신을 축하합니다’라며 카메라가 셔터를 누르자, 어머니가 힘차게 촛불을 끄시면서 사진 속으로 들어 왔다. 아, 이게 마지막 사진일까? 백수를 보낸 이후부터 우리는 어머니의 생신 때마다 ‘이게 끝(the End)일까’ 하는 아쉬움을 안는다.

 

역시 막내는 막내다. 얼른 어머니를 얼싸안고서 “어머니, 고맙수다, 예! 이 막내딸을 이추룩 곱닥허게 낳아주시고, 그동안 우리 정례네 집 하나만 주십서 허멍 새벽마다 기도해 주시난.... 이추룩 꿈보다 더 좋은 집이 우리안티 와수다게!” 아, 어머니는 바로 이날을 기도하시면서 지난 1년을 꿋꿋하게 견뎌내신 거다.

 

이제 다시 1년을 무사히 보내고서, 한 번 더 어머니와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오, 주님! 돌아올 그날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함께 있게 해주신 오늘을 감사하며, 올봄에는 날마다 ‘오, 해피 데이(Oh, happy day)’를 부르게 하옵소서. 김성춘(金成春), 그 이름처럼 어머니의 하루하루가 늘 봄날이게 하소서.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한데 이어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와 법환좀녀학교도 다니며 해녀로서의 삶을 꿈꿔보기도 하고 있다.

 


 

허정옥 논설위원 jhhospit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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