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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8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 고대 문인들의 취미를 얘기할 때 사람들은 ‘금기서화(琴棋書畵)’ 네 가지를 생각한다. 이것은 고대 문인들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외에 ‘휘파람’도 중국 고대 문인들의 취미 중 하나였다. ‘嘯(소)’라 하는데 ‘취성(吹聲)’(『설문』)으로 우리가 흔히 부는 ‘휘파람’이다. ‘휘파람’은 고대 문인 명사들의 사랑을 받았다. 위진(魏晉) 시대는 휘파람을 부는 풍조가 성행해 명사가 되기 위해 갖춰야할 아취(雅趣)였다.

 

완적(阮籍)은 위진 시기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명이었다. 완적이 휘파람 불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벽돌에 새겨진 그림뿐만 아니라 역사서에도 기록돼 있다. 『진서․완적전』에 소문(蘇門)에서 손등(孫登)을 만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완적이 손등과 학문을 논하려 했지만 손등이 응하지 않자 “완적은 휘파람을 불고 물러났다. 고개를 반쯤 내려왔을 때 난(鸞)새와 봉황의 소리가 들렸다.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손등의 휘파람 소리였다.” 이렇게 보면 손등의 ‘휘파람’은 완적보다도 뛰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등을 ‘장소대사(長嘯大師)’라 불렀다고 한다.

 

 

 

 

고대 문인 명사들은 ‘휘파람’에 정성을 들였다. 서진(西晉) 때 성공수(成公綏)가 『소부(嘯賦)』를 썼는데 ‘휘파람’을 부는 방법과 휘파람의 음조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휘파람의 발성에 대해 얘기하고 마음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선율이 있고 높고 낮음, 길고 짧음의 절주가 있다고 했다. 휘파람의 효과는 우생(竽笙)이나 거문고, 비파와 비교할 수 있다고까지 했다. 휘파람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문인 명사들은 왜 ‘휘파람’을 좋아했던 것일까? 휘파람은 무슨 작용을 했는가?

 

휘파람을 불면서 서정(抒情)할 수 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휘파람은 『시경』에도 기록돼 있다. 『소남․강유사』에 “저 아가씨 시집가나, 나를 버리지 않고,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나중에 휘파람 노래 부르리라.”가 있으며 『대아․백화』에 “휘파람 노래 부르며 그리움에 속상하여 저 석인을 생각하노라.”라는 내용이 있다. 휘파람을 좋아하던 부류는 당시에는 여성이었다. 여성들이 마음이 우울하거나 원망이 있을 때 휘파람으로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을 것으로 본다.

 

이런 과점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고금주․음악편』의 상릉목자(商陵牧子)를 특별한 예로 든다. 그는 결혼 후 5년이 됐는데도 자식이 없자 재취하려 했다. 부인은 무척 상심하여 한밤중에 일어나 방에 기대어 슬픈 휘파람을 불렀다. 이것이 바로 여인들이 휘파람으로 자신의 정서를 표출하였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휘파람이 무술(巫術)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무술을 행하면서 혼을 부르는, 즉 초혼(招魂)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초사․초혼』에 “혼백을 부를 모든 준비 갖추고 길게 부르나니(招具該備,永嘯呼些.)”라고 했다. 왕일(王逸)이 주를 달면서 휘파람을 불면서 망자의 혼백을 부른다고 했다.

 

갈홍(葛洪)의 『신선전』에도 휘파람으로 혼을 부르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서한(西漢) 때 유근학(劉根學)이라는 사람은 도를 배워 ‘術(술)’을 할 줄 알았는데 태수가 그에게 현장에서 초혼하도록 했다. 만약 혼을 부르지 못하면 처벌을 하겠다고 으름장도 놓고. 어쩔 수 없어 유근학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휘파람을 불렀다. 그러자 “듣는 자들은 모두 휘휘했고 모든 객들이 두려워했다.” 마침내 벽이 갈라지며 틈새로 많은 호위병들이 수레를 끌고 나왔다. 수레에는 태수의 망부와 망모가 성긴 밧줄로 꽁꽁 묶여 있는 것을 보고 태수는 벙어리처럼 말을 못했다고 한다.

 

이외에 휘파람이 문인 명사의 거만한 풍도를 나타내는 것이라 보는 사람들도 있다. 동한(東漢) 이후 문인 명사들이 휘파람을 부는 고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왕휘(王徽)가 젊었을 때 오중(吳中)의 한 집안에 아름다운 대나무가 있다고 듣고는 보고 싶은 마음에 “수레를 타고 나가 만든 대나무 아래서 휘파람을 불었다.”

 

『세설신어』에 당시 사대부들의 광태(狂態)를 잘 기록하고 있다. 그중 「임탄편」, 「아량편」, 「문학편」, 「언어편」에는 문인 명사들의 ‘음소(吟嘯)’, ‘풍소(諷嘯)’, ‘장소(長嘯)’를 행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대체로 “위진 시대에는 천하가 혼란하였기” 때문에 휘파람을 부는 풍조가 광범위하게 유행됐고 서서히 문인 명사들의 중요한 풍류의 하나로 고착됐다고 본다. 그 시기의 휘파람은 일종의 형식일 뿐이었다. 휘파람을 불며 거만함과 광태로 내재된 영혼을 표출해 냈던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은 욕심이 없고 깨끗했다. 그의 『음주시』에 “동쪽 툇마루 아래 휘파람 불며 거니니, 또 다시 이 삶을 얻은 듯하다.(嘯傲東軒下,聊復得此生.)”고 했다. 『귀거래사』에는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登東皐以舒嘯,臨淸流而賦詩.)”라는 구절이 있다. 비록 고고함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문장 속에는 문인 명사들의 고고한 태도가 담겨 있다.

 

 

 

 

넷째로 휘파람을 가사가 없는 가곡으로 봤다. 혜강, 완적, 여안(呂安), 향수(向秀), 그리고 오등 등은 ‘가사가 없는 노래’를 불렀다. 이른바 ‘장소(長嘯)’로 억지로 번역하면 길게 부르는 휘파람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시인들이 됐다. 휘파람에는 분명 가사가 없다. 그러나 휘파람이 과연 ‘가사가 없는 노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휘파람을 부는 것과 노래를 하는 것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둘이 다른 것은 확실하다”고 부정한다. 사실 휘파람의 발성의 특징은 노래가 아니고 부는 것임은 확실하다.

 

오늘날 대중 앞에서 휘파람을 불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고 속된 행동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고대의 문인 명사들은 휘파람을 부는 풍습을 즐겼다. 역사서에 기록된 것이 많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명칭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유명한 시 중에서도 이러한 풍속에 대해 감탄하기도 했다. 왕유(王維)는 “그윽한 죽림 속에 홀로 앉아 거문고 뜯고 다시 휘파람 분다(獨坐幽篁裡,彈琴復長嘯)”라는 시구라든지 이백(李白)의 “남천문에서 긴 휘파람을 불어보니, 만 리의 맑은 바람이 불어오네(天門一長嘯,萬里淸風來)”의 시구가 그것이다. 이처럼 중국 고대 문인 명사들에게 휘파람은 일종의 ‘유행’했던 습속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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