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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9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이현(李賢 : 653-684), 자는 명윤(明允), 당(唐)나라 고종(高宗)의 아들로 무측천(武則天)의 소생이다. 영휘(永徽) 6년(655)에 왕에 봉해졌고 상원(上元) 2년(675)에 황태자가 됐다. 나중에 모친 무측천과 간극이 생겨 영융(永隆) 원년(680)에 서인으로 폐위됐고 파주(巴州)로 쫓겨났다. 무측천이 정사를 맡은 후 자살을 명받았다. 건릉(乾陵)에 배총(陪冢)됐고 후에 장회태자(章懷太子)에 책봉됐다.

 

섬서(陝西) 건현(乾縣)에 당 고종(高宗)과 무측천의 합장묘인 건릉(乾陵)이 자리 잡고 있다. 건릉은 양산(梁山)에 의지해 으리으리한 외형으로 기개가 드높던 성당(盛唐)의 관경을 표현해 내는 듯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외에 배총(陪冢)인 장회태자 이현의 묘와 이현의 조카 의덕(懿德)태자의 묘, 질녀 영태(永泰)공주의 묘가 있다. 이상한 것은 건릉 동남쪽 약 3킬로미터에 있는 장회태자 이현의 묘와 건릉 주변에 있는 다른 배총과 비교하면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구조와 스타일에 있어서도 분명 한 단계 아래라는 점이다.

 

 

 

 

이 문제를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장회태자 본인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한다. 장회태자 이현은 무측천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후한서』에 주(注)를 달 정도로 당시 지명도가 있는 학자였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장회태자는 생전에 불우한 운명을 가진 인물이었다. 자기의 어머니인 무측천에 의해 태자 자리에서 쫓겨났고 어머니의 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죽은 후에는 건릉 옆에 부장품처럼 처리되었고.

 

그러나 현대 60년대 초 학자이며 시인인 곽말약(郭末若)은 이현의 묘를 회상하면서 “건릉에 부장됐으니 은혜가 특별하나니, 모친의 깊이를 곡해하지 마소”라고 읊었다. 건릉에 부장된 것 만해도 큰 은혜를 입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무측천이 아들을 죽인 것은 깊은 감정에 의한 자애(慈愛)라는 말이 된다.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다.

 

역사서 기록에 따르면 이현은 그의 형 이홍(李弘)이 죽고 나서야 태자가 됐다. 그는 재능이 뛰어나 당시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고 고종의 찬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때 부당한 방법으로 무후(武后)의 신임을 받던 명숭엄(明崇儼)은 늘 무후 면전에서 태자가 국가의 대통을 이을 능력이 없다는 등과 같은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동시에 궁중에는 이현은 무후의 언니 한국부인(韓國夫人) 소생이라는 말도 퍼져 있었다. 더욱 이현을 걱정되고 불안하게 만든 것은 무후가 북문학사(北門學士)에게 명해 『소양정범』, 『효자전』등을 편찬해 이현에게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늘 이현이 잘못하고 있다고 나무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때문에 이현은 「황대과사(黃臺瓜辭)」를 지었다.

 

種瓜黃臺下(종과황대하), 황대 아래 오이를 심었더니
瓜熟子離離(과숙자리리). 오이 익어 주렁주렁.
一摘使瓜好(일적사과호), 하나를 따자 남은 오이 보기 좋더니
再摘令瓜稀(재적령과희). 둘을 따자 오이 듬성듬성.
三摘尙云可(삼적상운가), 셋을 따자 그나마 괜찮았지만
四摘抱蔓歸(사적포만귀). 네 개를 따자 빈 넝쿨 뿐.

 

이 시는 분명 당시 이현의 좌불안석의 심정을 반영하고 있다. 자신도 친형 이홍처럼 죽임을 당하는 운명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시로 “자기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좋을 게 없어요”라는 말을 암암리에 표현하고 있다. 나중에 무후가 이현이 사람을 시켜 명숭암을 살해할 것이라 의심해 기회를 잡고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켰다. 그리고 파주로 유배를 보냈다. 684년 무후가 정권을 잡자 즉시 잔혹하기로 유명한 관리 구신적(丘神勣)을 파주로 보내 이현을 죽인다.

 

 

 

 

곽말약은 「나는 왜 『무측천』을 썼는가」라는 문장에서 천여 년 동안 공인된 무후가 아들을 피살했다는 사건을 가지고 정식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태자 이현의 죽음은 다른 이유가 있다고 했다. 이것은 역사서 기록에 따른 현안이라 보았다. 곽말약은 『자치통감』의 관련 기록을 보면 무후가 구신적을 이현이 안치된 파주로 보내 “죽이라고 했다”고 돼 있지만 이 말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신․구당서 「장회태자전」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도 모르는데 사마광(司馬光)이나 이후에 사람들이 무후가 “죽이라”고 밀명을 내린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곽말약은 무후가 구신적을 파주로 보낸 목적이 이현을 수도로 불러 다시 기용할 생각이었다고 해석했다. 그렇다면 이현은 도대체 누구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인가? 당대 장빈(張梹)이 쓴 『조야첨재(朝野僉載)』를 근거로 당시 중서령(中書令)이었던 배염(裵炎)이 사사로이 이현을 죽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무후가 이현을 수도로 불러 다시 기용하려 했다는 내용이나 배염이 사사로이 이현을 죽였다는 내용의 기록은 역사 자료에는 없다. 그래서 학술계에서는 곽말약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무측천은 사성(嗣聖) 원년(684) 2월 6일에 그녀의 셋째 아들 중종(中宗) 이현(李顯)을 폐한다. 만약 그녀가 정말 이현(李賢)을 다시 세우려고 했다면 왜 기다리지도 않고 7일에 그의 넷째 아들 이단(李旦)을 황제에 앉혔을까? 구신적을 파주로 파견한 것은 9일이다. 그리고 배염이 진짜 찬위를 모의할 정도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째서 경성에 남아 있는 이현(李顯), 이단, 무후를 죽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던 폐서인 이현을 죽이러 간다는 말인가?

 

 

 

 

곽말약이 의문을 제기한 후 이현이 누구에 의해 죽었느냐는 문제는 역사의 수수께끼가 돼 버렸다. 사실 이 의문을 부정한다고 해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문제가 남아있기는 하다. 무후가 왜 자신의 아들인 이현을 죽여야만 했을까?

 

이 문제에 대해 4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 무측천은 태자가 모반을 꾸몄다고 의심을 품었다고 본다. 이현이 병기를 숨기고 모반을 획책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둘째, ‘모자(母子) 쟁권(爭權)’설이다. 무측천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 큰아들 이홍, 둘째 아들 이현 형제를 죽여 장애를 없앴다고 본다. 셋째는 앞서 말한 ‘출신’설이다. 이현의 죽음은 그가 무측천의 친아들이 아니고 무후의 언니 한국부인의 낳은 아이였기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원래 자신의 아들도 아닌 이현을 태자로 앉힌 것은 당시 무측천이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현이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나서 폐서인이나 피살된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고 하고.

 

넷째는 ‘중상모략’설이다. 1972년 출토된 「장회태자이현묘지명」이 그 근거다. 묘비명에 보면 한무제(漢武帝)가 강충(江充)의 중상모략에 의해 태자 유거(劉据)를 죽였고 진(晉) 혜제(惠帝)가 가후(賈后)의 중상모략에 속아 민회(愍懷)태자 사마휼(司馬遹)을 폐위했으며 진(晉) 헌공(獻公)은 여희(驪姬)의 이간질하는 말을 믿고 신생(申生)을 죽인 전고들이 보인다. 이는 이현의 죽음이 소인배들의 중상모략에 의해 피살됐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추론한다.

 

장회태자 이현이 과연 누구의 손에 죽었는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무측천이 죽였다면 왜 자신의 아들을 죽였을까? 중국 전제주의 사회의 잔혹함이 이현의 죽음 속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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