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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0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니야(Niya, 尼雅)는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자치구 민풍(民豊) 현 북쪽으로 약 120km 떨어진 타클라마칸사막에 있는 오아시스다. 선선(鄯善)왕국의 서방영토였으며 전한(前漢)의 정절국(精絶國)이 있던 곳으로 여겨진다. 니야는 서역남도(西域南道)의 중계지점의 하나였다. 동쪽은 차말국(且末國) 서쪽은 융로국(戎盧國)과 접하고 있었다. 후한(後漢) 때는 사차국(莎車國, Yarkand)의 지배를 받았으나 우전(于闐)에게 멸망당한 후, 동쪽으로부터 세력을 뻗친 선선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됐다. 644년경 이곳을 통과한 현장(玄奘)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이양성(尼壤城)’으로 기술하고 있다.

 

고대 유적 니야는 곤륜산맥(崑崙山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니야 강의 말단에 있는 동서 약 5킬로미터에 산재하는 집락지(集落址)로 1901년 이래 3차에 걸쳐 영국의 M.A.스타인에 의해 발굴돼 카로슈티문서 등이 출토됐다. 이 유적은 3-4세기경 로프노르 호반의 크로라이나를 수도로 해 번영했던 선선왕국의 서쪽 끝에 위치한 오아시스였음이 판명됐다. 니야 유적은 3세기 후반에 방치돼 당(唐) 현장이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황폐돼 있었다.

 

본 세기 초 영국 탐험가 스타인이 세 차례에 걸쳐 니야 지역을 탐험하고 700여 점의 목간문서와 50여 건의 한문서 등 각종 유물을 수집했다. 이로부터 휘황찬란했던 니야 고대 문화는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세계의 탐험가와 고고학자, 생태학자들이 탐험하는 중심지가 됐다.

 

 

 

 

니야는 옛 서역 36국이 있었던 실크로드에 위치해 있다. 불교와 이슬람교가 그곳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다. 니야는 옛 누란 왕국보다도 더 신비롭다. 규모가 방대하고 그나마 잘 보존된 폐허의 고대 문명 유적은 유명한 고 로마의 성곽보다도 기세가 웅혼하며 아름답다. 니야 유적은 동서로 약 7킬로미터나 되고 남북으로 26킬로미터나 되는 광활한 영토를 자랑한다. 불탑을 중심으로 70여 곳의 거주 유적과 분묘들이 있다. 많은 축사, 정원, 성벽, 옛 물길, 호수, 방죽, 농지, 수로, 고목 등 자연과 인문 유적이 즐비하다.

 

현존하고 있는 니야 유적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멀리에서 보면 끊임없이 이어진 모래언덕에 둘러싸여 연이어진 말목이 지면 위로 드러나 있다. 말목은 그 당시 가옥의 뼈대이며 문틀이다. 어떤 말목은 대들보가 얹혀 있다. 가옥 건물의 절반은 모래 속에 매몰돼 있다. 황사 중 곳곳에 남은 뼈대가 앙상하게 늘어서 있다. 잘게 부수어진 홍색, 흑색의 도기 파편들이 지면에 흩어져 있다. 모래바람이 한바탕 불고 나면 유적지 부근에서 유리 구슬꿰미 등 오채영롱한 장식품들을 볼 수 있다. 지면에는 비교적 완전한 오지동이, 단지, 나무덮개 등이 드러나 있다. 묘지에는 관과 미라가 된 시체 및 비단 면포 등 직물의 잔편들이 널려 있다. 황량한 폐허가 됐지만 그 당시 고도로 발달된 경제 수준과 생활수준을 엿볼 수 있다.

 

니야 유적의 건축물들은 버려질 당시의 면모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옥의 윤곽을 통해 어디가 복도고 대청이며 침실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으며 어디가 주방이고 저장고이며 축사인지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어떤 방의 문은 반쯤 열려 있어 방안에 아름다움 벽난로가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000년 전의 축사 속에는 아직까지도 양과 낙타들의 똥들이 쌓여 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집 주인이 막 떠나 곧 돌아올 것만 같은 착각을 들게 할 정도다.

 

니야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다. 불교, 이슬람교가 중국으로 전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역이었다. 그런 까닭인지 니야 유적지의 상징이면서 중심부에 위치한 건축물은 불탑이었다. 3층 불탑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아래 2층은 정방형이고 위층은 원추형이다. 탑신은 흙벽돌과 진흙을 이용해 쌓았고 밖으로는 진흙을 발랐다. 탑신의 남쪽은 이미 무너져 내려 쌓아올린 흙벽돌이 밖으로 드러나 있다. 니야의 불탑과 중국의 전통 불탑은 상당히 다르다. 바리때를 엎어 놓은 듯한 모양으로 인도의 불탑과 풍격이 일치한다. 불탑 주변에는 사찰이 있기 마련이지마는 니야의 불탑 주변에는 아직까지도 사찰 건물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니야의 여러 가지 수수께끼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니야 유적의 옛 무덤에서는 미라가 자주 발견되면서 니야의 최고가 되었다. 과학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사람들은 영혼이 인체에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사망에 이른다고 보았고. 과거의 제왕들은 생전에 단약이나 묘약을 먹으면서 장생불로할 것이라는 환상에 젖었다. 장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시체를 보존했다. 그들은 시체가 썩지 않으면 영혼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계속해서 지하세계에서 귀신이 된 장졸들을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고. 요(遼)나라 때 고분 발굴 중 수은과 주사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시체를 보존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니야 유적에서 발굴된 미라는 그것들과는 다르다. 시체에 방부제를 처리했던 흔적이 없었다. 완전히 자연 조건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1993년 니야 발굴 중 불탑 북쪽의 묘지에서 목관이 발견됐다. 관 속의 시체는 미라가 돼 있었다. 궁형의 목관에는 묘령의 소녀가 누워있었다. 사지가 굽혀 있고 옆으로 눕혀 있었다. 입은 옷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 명주견의 속옷이 입혀 있었고 홍색 양모로 만든 도랑치마로 덮어 씌워 있었다. 시체의 대부분은 손상되지 않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홍의소녀(紅衣少女)’라고 불렸다.

 

불탑 동쪽의 다른 묘지에서도 미라가 발견됐다. 그중 한 구는 여자 시신으로 비교적 잘 보존돼 있었다. 검은 머리가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고 용모가 수려했다. 가늘고 긴 버들눈썹을 가지고 있는 막 그린 그림인 듯한 20여 세의 젊은 여자였다. 얼굴 부분의 근육은 크게 변하지 않아 탄성이 있는 듯 보였다. 다른 한 구는 남자였다. 흉강 아래쪽은 이미 부패됐지만 머리 부분은 잘 보존돼 있었다. 짙은 눈썹에 큰 눈, 수염이 나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예전 그대로인 중년인이었다.

 

니야 지역에 미라가 자주 발견되는데 현지인들에게는 평범한 일이었지만 외지에서 간 전문가들은 대단히 중시했다. 니야는 왜 그렇게 많은 미라가 존재할까? 미라는 왜 보존 상태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을까? 이러한 문제는 과학 연구의 중요한 과제가 됐다. 시신의 부패는 식물의 부패와 같이 세균 작용의 결과다. 세균의 존재와 활동은 일정한 온도와 습도, 공기가 갖춰져야 한다. 상온에서 세균은 생존할 수 있으나 특별히 건조한 지역과 공기가 없는 곳에서는 세균이 생존하기 어렵다. 호남(湖南)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서한 묘의 여자 시신은 습한 곳에서 만들어진 미라이다. 2100년 동안 부패하지 않은 것은 묘실이 깊고 폐쇄돼 있어 공기가 단절돼 만들어 졌다. 니야 지역의 고대 미라의 존재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건조한 기후가 만든 것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대단히 건조하다. 시신은 열풍과 강한 햇빛, 고온 등에 의해 신속히 탈수가 진행된다. 그래서 시신은 말라 쪼글쪼글해지고 마른 목재처럼 메마르게 된다. 피부 층이 수축되고 골격이 달라붙는데 이는 시신이 탈수됐기 때문이다. 세균이 활동하기 이전에 시신이 거의 탈수돼 세균의 생존 조건이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시신은 미라가 돼 보존돼는 것이다. 시신 이외에 니야 지역의 다른 문물들이 그나마 완전하게 지금까지 보존된 까닭도 극단적으로 건조한 기후와 관련이 있다.

 

니야 고분 중의 미라는 일부분은 온전하고 일부분은 부패한 상태로 발굴되기도 했다. 백골이나 머리카락만 남긴 경우도 많다. 같은 니야 지역에 왜 다른 형태의 시신이 발굴될까? 많은 이유가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강수량은 해마다 다르다. 어떤 때는 강우량이 많고 어떤 때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을 경우도 있다. 현대 기상 전문가의 연구에 따르면 타클라마칸 사막 중의 연평균 강수량은 20-25밀리미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떤 해는 비가 25.2밀리미터밖에 내리지 않을 경우도 있고 많은 해에는 73.5밀리미터가 되기도 한다. 강우량이 가장 적은 해에 매장한 시신은 미라가 되기 쉽고 강우량이 많은 해에 매장된 시체는 쉽게 부패된다. 1년 중에서도 건조한 계절에 매장하느냐 습한 계절에 매장하느냐에 따라 시신의 보존에 다른 영향을 미쳤다.

 

시신마다 구체적인 상황이 전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비만해 체내 함수량이 비교적 많고 어떤 사람은 말라 체내 함수량이 비교적 적다. 같은 기후 조건 아래 함수량이 많은 시신은 쉽게 부패되고 함수량이 적은 시신은 부패되지 않아 보존된다. 묘지 현장을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같은 시신이라 할지라도 부위에 따라 부패의 정도가 다르다. 어떤 시신은 흉강, 복강이 완전히 부패됐으나 머리와 사지는 잘 보존된 경우가 있다. 이는 흉강과 복장의 함수량이 머리나 사지보다도 많은 까닭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를 만들 때 내장을 모두 제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사람의 시신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는 내장을 적출해야 한다.

 

위와 같은 이유로 고대 니야 고분 중의 시체는 천차만별이다. 일부의 시체는 미라가 됐고 어떤 것은 완전히 부패된 것도 있으며 어떤 것은 반은 부패가 됐고 반은 미라가 된 경우도 있다. 모든 시체가 미라가 된 것은 아니다.

 

니야 유적과 고고학 발굴 결과에서 보면 2000여 년의 사막의 모래바람도 당시의 휘황찬란한 문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2000여 년 전 니야 강 하류 사막 내지의 삼각주에는 산림이 무성한 오아시스였음을 보여준다. 삼각주에는 수로가 많았고 호수가 분포돼 있었다. 니야의 사람들은 수로를 따라 거주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니야는 언제 지구상에서 사라졌을까?

 

추론에 따르면 지금부터 1500년 전 인류의 활동이 환경 생태계를 파괴했다. 부단히 증가한 인구는 식생과 수자원을 파괴했다. 민족과 종교에 의한 전쟁도 빈번히 발생했다. 생산 방식이 낙후돼 있어 수원이 고갈됐다. 특히 수원의 고갈 때문에 니야는 황사에 의해 잠식당하게 되고 마침내 사막 가운데에 잠들어 폐허만 남겨 두게 됐다. 이후 니야는 신비라는 두꺼운 면사포에 가려져 후세에 서스펜스가 됐다. 그리고 천고의 미스터리가 됐고.

 

 

 

 

니야 유적 북쪽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옛 강줄기를 따라 많은 도기 조각 등의 문물이 산재해 있다. 연대는 니야보다도 이르다. 니야의 남쪽 사막 내지에 다마자(大麻扎)와 카바커촌(卡巴克村, 니야 강의 끄트머리에 있다)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 사이에서 계속해서 고대 유적지가 발굴되고 있다. 이는 환경의 악화, 수원의 변화 등에 따라 사람들도 물줄기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크로드’의 남도(南道)도 끊임없이 남쪽으로 옮겨왔음을 말하고 있다. 다마자, 카바커촌에서 민풍(民豊) 오아시스 일대의 광대한 지역의 건축물과 주민들의 생활 습관 등을 보면 이미 밝혀진 고대 니야와 닮은 부분이 대단히 많다. 이는 그들이 니야 사람들의 후예라는 것을 증명한다. 환경이 악화되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원래의 고향과 도시를 버리고 자신들이 살기에 적합한 지역을 찾아 이주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니야의 흥망성쇠는 물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신장웨이우얼자치구 남부에 커다란 담수호가 있었다고 한다. 곤륜산에서 내려오는 야르칸드 강(Yarkand River), 허톈 강(Xoten(Hotan) River), 커리야 강(Keriya River), 니야 하(Niya River) 등 강의 수량이 많았고 모두 사막을 통과한 후 타림 강(Tarim River)으로 모여들었다. 니야의 수원은 니야 하(河)가 공급했다. 니야 하의 수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니야 사람들의 생존과 이주를 결정지었다. 수자원이 풍부할 때 하류에 삼각주를 형성해 오아시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니야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이후 환경이 악화되면서 사막화가 확산됐다. 수원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니야는 소멸됐다. 그때가 대략 4세기 전후다.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시기다.

 

니야의 멸망을 초래한 환경 변화 중 수자원의 고갈 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지형의 융기다. 지형이 융기하면서 대기의 환류에 영향을 미쳤다. 니야 지역은 바로 동북쪽의 바람받이(windward slope)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거대한 모래바람의 침식과 퇴적 작용의 영향을 받았다.

 

니야의 소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인류가 자신들의 생존의 기반인 생태 환경을 주의해 보호하지 않으면 아무리 위대하고 휘황찬란한 문명이라 할지라도 파괴될 수밖에 없고 절치액완(切齒扼腕)의 폐허가 될 수밖에 없음이니.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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