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1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송(宋) 태조 조광윤(趙光胤 : 927-976)은 탁주(涿州, 현 하북 탁현) 사람이다. 949년 종군하여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의 관직에 올랐다. 7살의 공제(恭帝)가 즉위한 후 조광윤은 ‘진교병변(陳橋兵變)’을 책동해 송나라를 건국한다. 963년 형호(荊湖)를, 966년 후촉(後蜀)을, 971년 남한(南漢)을, 975년 남당(南唐)을 멸하고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라는 천년의 미담을 남겼지만 ‘촉영부성(燭影斧聲)’의 전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죽은 후 동생이 즉위하는데 바로 태종이다.

 

‘진교병변’은 960년 송 태조 조광윤이 7세의 후주의 공제(恭帝)에게서 왕위를 이어받아 송나라를 세우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다. 959년 오대십국 중 가장 명군으로 평가 받는 후주의 세종이 급사하자 7세에 불과한 공제 시종훈(柴宗訓)이 그 제위를 이었다. 960년 정월, 어린 황제를 모시고 요나라와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군인들이 출정 도중에 개봉(開封) 부근의 진교역(陳橋驛)에서 조광윤에게 술을 만취하도록 먹이고 정신을 잃은 그에게 황포를 입혀 강제로 황제에 추대하였다. 조광윤은 조보(趙普), 조광의(趙匡義) 등의 추천에 못이기는 척하며 개봉에 입성해 어린 시종훈에게 황제를 선양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이것을 진교병변(陳橋兵變) 또는 진교의 변[陳橋之變]이라고 한다.

 

뜻밖에 전 황제가 죽고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행운을 맞이한 것도, 그 기회를 활용해 역성혁명을 벌인 것도 수 문제나 송 태조나 똑같다. 그러나 조광윤은 즉위 후 자신에게 제위를 넘겨준 어린 황제를 비롯한 전 왕조의 황족을 살육했던 수 문제와는 달리, 시종훈과 그 친인척들을 정중히 대접하였다. 또한 한 고조나 명 태조 같은 창업황제들과 달리, 자신을 황제로 이끌어 준 공신들을 ‘토사구팽’시키는 피비린내는 없었다.

 

 

 

 

황제가 된 후 조광윤은 진교에서 자신을 황제로 받든 5대 공신을 불러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거나하게 취했을 무렵 이렇게 말을 꺼냈다. “경들이 없었더라면 어찌 지금 짐이 이 자리에 있었겠소? 감사하오.” “하지만 한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소. 짐은 경들을 전적으로 믿지만 경들 중 누군가가 언젠가 딴 마음을 먹고 술 취한 주군에게 황제의 옷을 입힐지 알 수 없지 않소?” 그 말을 듣고 다섯 공신은 혼비백산하였다. 조광윤은 계속 술을 돌리며 “아, 인생이란 무엇이오? 절벽 틈을 달리는 말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 아니요. 모두들 하나같이 부귀를 원하지만, 얼마 안 되는 삶을 편안히 살다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뿐인데. 그나마 지키기 힘드니 말이오.” “그러니 경들은 각자의 병권과 지위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면 어떻겠소? 그러면 여생은 아무 염려 없이 평안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서 조광윤은 공신들에게 혼인으로 믿음을 만들자고 권했다. 결국 공신들은 황제의 뜻에 따라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내려갔다. 이것이 “술잔을 들면서 공신들의 병권을 없앴다”는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은 개보(開寶) 9년 10월 10일 밤에 일어난다. 송나라의 개국 황제 태조 조광윤이 갑자기 죽는다. 이튿날 그의 동생 조광의(趙光義 : 939-997)가 황위를 계승한다. 송 태종이 그이다. 조광윤은 17년간 제위에 올랐고 976년에 죽으니 50세였다. 그의 사인이 수상하다. 이른바 ‘촉영부성’이라는 전설의 시작이다.

 

황위가 바뀔 때 발생한 칼날이 번뜩이고 피 냄새가 낭자한 골육상쟁은 봉건사회라는 중국 몇 천 년의 역사 속에서 흔하게 일어났다. 송 태조의 죽음에 대해 『송사․태조본기』에는 짤막하게 기재돼 있다. “계축(癸丑) 저녁, 황제가 만세전에서 붕어하셨다. 세 50이요 전의 서쪽 계단에서 발인하였다.” 그런데 송대의 필기 야사에는 기이한 기록이 보인다. 예를 들어 광범위하게 읽혔던 『송사연의』에는 송 태조의 죽음이 그 동생 조광의와 연관돼 있다고 했다.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 태조는 천성적으로 우애가 깊었다. 형제 사이에 아무런 거슬림이 없이 화목했다. 광의가 병을 얻었을 때 태조가 그에게 쑥뜸을 해줬고 광의는 두터운 형제애를 느꼈다. 태조는 광의에게 언젠가는 태평세계의 천자가 될 터이니 위풍당당함을 잃지 말라고 했다. 광의도 기쁘고 다행스럽다 여기며 형을 공경하였다. 태조가 수명을 다하게 되었을 때 동생과 같이 연회를 베풀었다. 그런데 고질이 발병해 점점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나중에 와병하니 모든 국정은 광의에게 대리하도록 하였다. 광의는 조정의 일을 보면서 밤에는 형의 병을 간호하니 바쁘기 그지없었다.

어느 날 저녁 큰 눈이 내려 광의가 좀 늦게 입궁하였다. 내시가 급히 입궁하라 하조하였다. 광의가 명령을 받고 급히 입궁했더니 태조의 호흡이 이상했다. 광의를 보고서도 말을 하지 못했다. 광의가 한참 동안 기다렸으나 직접 명령을 받지 못하고 위문만 할 수밖에 없었다. 태조는 눈을 뜨고 밖을 응시하였다. 광의는 멋대로 그 뜻을 알아챈 듯 내시들을 물리치고는 혼자서 고명을 들으려 했다. 괴이하기는 했으나 내시들은 감히 명령을 무시할 수 없어 침실 문밖으로 나갔다. 먼 밖에서 문 안의 동정을 살폈다. 태조가 광의에게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은 끊어질 듯하면서 이어졌다. 목소리가 너무 낮아 무슨 내용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편각이 흘렀을까, 촛불이 흔들렸다.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는 것을 보니 광의가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머뭇머뭇 물러서는 모양처럼 보였다. 이윽고 주부(柱斧, 수정으로 만든 작은 도끼, 조관들이 사용한다)로 땅을 치는 소리가 들렸고 태조가 큰 소리로 “그래 네 맘대로 해!”하는 말이 들렸다. 말소리가 격하면서도 슬펐다. 무슨 까닭이지 광의가 침실 문 옆에서 내시를 불러 황후와 황자 등을 속히 모셔오라 명했다. 내시들이 각기 부름을 전하러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침상으로 모였다.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태조는 이미 죽어있었다.

 

 

 

 

자! 촛불이 흔들리고 도끼 소리가 들린 이 미스터리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가? 자질구레한 일을 적은 패관 야사에는 확실한 증좌가 없다.

 

어쩌면 태조가 등에 종창이 나 견디기 힘들어 하자 광의가 들어가 보니 여자 귀신이 손으로 등을 때리는 것을 보고는 도끼를 들어 귀신을 향해 찔렀다 ; 귀신이 피해 버리자 도끼는 종창을 찔렀고 태조는 아픔을 참지 못해 혼절한 후 절명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광의가 태조를 모해하기 위해 좌우를 물리고 기회를 틈타 손을 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는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증거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까닭이다. 그저 『송사․대조본기』에는 황제가 만세전에서 붕어했고 50세였다는 것만 기록하였다. 태조가 무슨 유언을 했는지 ‘촉영부성’의 이야기도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역시 패관 야사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와 정사에 있는 기록을 들춰볼밖에 도리가 없다.

 

야사에서는 신비하면서도 모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받아들이고 있고. 송나라 이후 여러 문인들이 송 태조가 어떻게 죽었느냐 하는 문제를 탐구했다. 하나의 의견은 송 태종이 “형을 죽이고 황위를 찬위하였다”고 본다.

 

다른 의견은 송 태조의 죽음과 송 태종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사마광(司馬光)의 『속수기문(涑水紀聞)』에 송 태종을 위한 해명을 근거로 한다. 『속수기문』에 따르면 송 태조가 붕어한 후 4경(更)이 됐다. 효장(孝章) 송황후가 태조의 넷째 아들 진왕(秦王) 조덕방(趙德芳)을 입궁하도록 사람을 파견했으나 사자는 급히 개봉부의 조광의를 불러왔다. 조광의는 크게 놀라 머뭇거리며 입궁하려 하지 않으니 사자가 여러 번 채근하자 비로소 눈보라 속에서 입궁하였다. 이를 근거로 태조가 죽을 때 태종은 침실에 없었기 때문에 ‘형을 죽일’ 수는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의견은 이렇다. 송 태종이 비록 형을 죽인 흉수는 아니라 하더라도 황위를 찬탈한 혐의만큼은 면할 수 없다고 본다. 조광의 즉위 과정을 보면 비정상적인 현상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 태종 즉위 후 이듬해에 개원하는 관례를 준수하지 않고 어째서 급하게 2개월밖에 남아있지 않은 개보 9년을 태평흥국 원년으로 바꿨을까? 두태후(杜太后)의 “황위를 동생에게 전하라”는 유조가 있어 그것을 지킨 것이라면 태종은 어째서 자기의 동생인 조정미(趙廷美)를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태종 즉위 후 태조의 둘째 아들 무공군왕 조덕소(趙德昭)는 왜 자살했는가? 태종은 형수 송후를 ‘개보 황후’로 봉했으면서도 그녀가 죽은 후 왜 황후의 예로써 안장하지 않았는가? 이상을 보면 송 태종의 즉위는 정상적인 계통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근대의 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송 태조가 비명횡사했다는 데는 긍정한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의학적인 각도에서 출발해 태조는 가족 유전인 조울증 때문에 죽었다고 본다. 또 다른 설은 태조와 태종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있기는 했지만 ‘촉영부성’의 사건은 우연에 의한 돌발 사건이라 본다. 태조가 숙면을 취하고 있는 틈을 이용해 그의 총비 화예부인(花蕊夫人) 비(費) 씨를 희롱하다가 태조에 발각되자 다른 방법이 없어 형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모든 설에는 나름대로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사실 어떻게 태조가 죽었고 어떻게 동생이 황위에 즉위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특히 태조의 사인은 어쩌면 영원히 미제로 남아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를 지도 모른다.

 

권력을 향한 남자들의 욕망은 골육상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반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거대한 왕국을 건설했던 조광윤도 역시 동생의 손에 의해 최소한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황위를 찬탈 당했으니, 뺏은 황위는 또 그렇게 뺏기는 것……, 중국의 역사는 늘 그렇게 봉건왕조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옛날에만 그랬을까, 그럼 지금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