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고등학생들에게 영자지를 맛보기로 강독한다. 기사를 고를 때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먼저 한국이나 제주와 관련이 있을 것, 기사의 배경이나 인물이 얼마간 알려져 있을 것, 지나치게 전문적인 영역이 아닐 것 등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우선이다. 공부라는 느낌이 없도록 해줘야 한다. 신문잡지 읽기가 또 하나의 과목이나 공부꺼리가 되고 말면 스트레스만 가중시킨다.
“The Korea Herald”나 “The Korea Times” 기사는 처음 읽는 아이에게도 의외로 쉽다는 반응이 나온다. 다만 어휘가 좀 달릴 뿐이다. 수위를 높여 “The New York Times”나 “The Washington Post”를 읽혀도 반응은 비슷하다. “TIME”에 이르면 어려워한다.
영어를 배우는 목적은 결국 이런 기사를 읽기 위함이다. 영어의 종착역에 먼저 가보게 하면 아이들은 자신감을 갖게 된다. 최고 지성인들이 읽는 신문이나 잡지라고 해도 어휘와 배경지식만 있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는 거리 감각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 신문 잡지는 사고력이나 판단력은 물론 창의력을 개발하는데 최고의 교재라 할 수 있다. 독해력은 물론 작문 실력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그래서 신문을 활용한 교육을 하자는 발상이 미국에서 나왔는데, 그걸 이르기를 ENIE(English Newspaper in Education)라 한다. 미국 초등학교에서는 “TIME for KIDS”와 “Scholastic News for Kids”가 공교육 부교재로 많이 쓰인다. 국내에도 초중등 아이들을 위한 킨더 타임즈, 키즈 타임즈, 영 타임즈, 틴 타임즈, 중앙일보 어린이 영자신문, 주니어헤럴드 등이 일간이나 주간지로 발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ENIE가 국내 교육현장에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공교육 사교육을 막론하고 교사들에게 있다. 일반 영어교재는 한번 가르치고 나면 같은 책을 몇 년 써먹을 수 있지만, 신문 잡지는 시의성이 있기 때문에 매번 교재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교사들을 위해 출판사에서는 교사를 위한 구문과 단어 정리며, 번역이며, 원어민 녹음 파일이며 시험문제 출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만들어 줌에도 불구하고 “누군 신문으로 영어 가르치면 아이들 좋은 줄 모르냐구?”라고 되묻기만 하며 실천은 하지 않는다. 너무 바쁘거나 게으르거나 실력이 없다는 소리다.
고향 일에 워낙 무심하다보니 제주에 이렇게 훌륭한 영어 매체가 있는지 몰랐다. 누가 만드는지 모르지만 “The Jeju Weekly"라는 주간지다. 관광, 문화, 레저, 교육, 환경, 비즈니스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제주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데, 놀라운 건 콘텐츠와 영어의 수준이 국제자유도시의 위상에 걸맞을 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다는 것이다.
기사 몇 개를 가지고 난이도를 측정해 보니 렉사일 지수(Lexile Measure) 1,100-1,300이 나왔다. 880 정도인 “해리 포터(Harry Porter)” 시리즈보다 높고, 미국 고등학교 2-3학년에 알맞은 수준이다. 한국에서는 평균적인 영문과 전공 정도가 되어야 읽을 수 있으므로 아직은 구독률이 높지 않을 수도 있겠다.
좀 더 쉽기만 하다면 제주의 공무원, 일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ENIE 교재로 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홈 페이지를 닫으려는 순간 주니어 저널리스트(Junior Journalist)가 쓴 기사들이 펼쳐졌다. 모두 125개의 기사가 와르르 쏟아졌는데, 무슨 보물을 줍는 것 같았다. 제주도내 중학생 가운데 선발된 학생기자들이 제주의 환경, 산업, 자연, 문화, 역사의 명소를 찾아 취재하여 쓴 기사라는 것이었다. 이 사업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에서 지원한다니 과연 걸맞은 일을 한다고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학생기자들은 4.3의 현장, 사려니 숲, 비치발리볼 대회, 재생 에너지 공단, 해녀촌, 탐라문화제 등을 찾아다니며 체험을 한 후 글을 써 올렸는데 그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물론 신문사 편집진의 도움을 받기는 했을 것이다.
무작위로 하나 뽑았다. 현재호 학생기자가 “The life of Haenyeo(해녀의 삶)”이라는 제목으로 쓴 기사를 시작 부분만 들여다보자.
There are a lot of jobs in the world. Most people can choose their jobs, but some are destined into jobs without the right of choice. One of those jobs is working as a haenyeo. Haenyo collect seaweed, shellfish, sea cucumber, and abalone. Only women who reside near the sea can work as haeyneo. They were born near the sea, so it is believed that they were meant to become haenyeo to earn a living. (세상에는 많은 직업이 있다.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직업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런 기회 없이 운명적으로 직업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직업 가운데 해녀가 그렇다. 해녀는 해초, 조개, 해삼, 전복을 캔다. 바닷가에 사는 여자들만 해녀로 일을 할 수 있다. 바닷가에서 태어난 탓으로 생계를 위해 해녀가 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번역을 하고 보니 한글만으로도 훌륭한 솜씨다. 415 단어로 된 이 글은 문장의 구성은 물론이고 문법과 어휘 사용에서 흠잡을 데가 없다. 다 보기를 원하면 여기를 클릭해 보시라. http://www.jejuweekly.com/news/articleView.html?idxno=3263
이 기사는 렉사일 지수 850으로, 우리나라 중학교 2학년 아이가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따라서 중학생으로서 이 정도의 기사를 써낼 정도라면 이미 영어에 상당한 수준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 다른 학생기자들의 수준도 비슷해 보인다. 이 아이들에게서 제주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영어를 통한 경쟁력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자기 고향과 나라에 대해 잘 알고 표현할 줄 아는 데 있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제주 위클리>에서는 학생기자 제도를 더욱 활성화시켜 이 같은 수준의 기사를 양산해내면 어떨까 한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여러 명에게 취재하게 하기 보단 개인마다 다른 과제를 주어 보다 다양한 내용을 보여줄 순 없을까? 나중에 중학교 수준의 쉬운 문장으로 된 제주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면 굳이 ENIE가 아니더라도 많은 제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유일하게 ENIE를 성공적으로 지도하는 선생이 있다. 모 어학원 양 모 박사는 “TIME”에서 발간하는 주간지 “TIME for KIDS”를 십분 활용하여 지도하고 있다. 아이들은 매주 발간되는 기사를 통해 전 세계의 이야기를 순전히 영어로 읽고 있다. 양박사와 원어민 교사는 영어로만 아이들을 지도함으로써 듣기, 말하기, 쓰기까지 자연스럽게 익히게 하고 있다.
제주 속담에 ‘동네 심방(무당) 안 알아 준다'는 말이 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늘 가까이 살다보면 몰라본다는 말이다. 영어공부를 하는 사람은 한번쯤 강남이나 대치동에 대한 동경을 가져봤을 것이다. 거기 선생은 뭔가 신통력이 있을 것 같고 뭐가 나아도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 바닥에서 10년 동안 지내며 온갖 영어교재를 만들어 본 경험에 의하면, 양 박사와 같이 학원과 교직, 동시통역사, 미항공우주국(NASA) 과학자 등의 경력과 실력을 가진 영어선생이 강남에는 없다.
성공적인 ENIE의 덕목은 순전히 부지런한 선생, 거기다 목적의식과 실력이 있는 선생에게 달려 있다. 진짜 실력 있는 제주의 동량(棟梁)을 양성하려면 이런 분들에게 가서 사정하면서라도 배워야 한다. “The Jeju Weekly" 같은 매체나 양 모 박사 같은 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보물을 양손에 쥐고 있는지도 모르고 평생 온 산을 헤매는 격이라 할 것이다.
☞강민수는?
=잉글리시 멘토스 대표.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며 영자신문 편집장을 지냈다. 대기업 회장실과 특급호텔 홍보실장을 거쳐 어느 영어교재 전문출판사의 초대 편집장과 총괄임원으로 3백여 권의 교재를 만들어 1억불 수출탑을 받는데 기여했다. 어린이를 위한 영어 스토리 Rainbow Readers 42권을 썼고, 제주도와 중앙일보가 공동 주관한 제주문화 콘텐츠 전국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ELT(English Language Teaching)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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