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쌤, 그런데 왜 세 사람 이름을 다 틀리게 써요?”
시사주간지 “타임”(TIME) 강독을 할 때 들어온 질문이었다. 그 날 준비한 기사는 2013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the 100 most influential people in the world)을 소개하는 연례적인 특집이었다. 남북한 합쳐 삼성의 권오현 부회장, 남한의 대통령 박근혜,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이 여기에 들었는데, 표기와 순서가 Oh-Hyun Kwon, Park Geun-hye, Kim Jong Un으로 제각각이었던 것이다. 그 때 내 대답이 이랬다.
“여권에 그렇게 되었겠지.”
사실 한글이름을 영어로 표기하는데 정답은 없다. 성(family name; surname; last name)과 이름(given name; first name)의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붙임표(hyphen)는 사용할 것인가, 철자(spelling)는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홍길동의 표기를 Hong Gildong 또는 Hong Gil-dong이라 쓰라고 하나 다만 권장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몇 년 동안 “TIME”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인에는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Lee Jong-Wook, 삼성그룹 회장 Lee Kun Hee, 북한 국방위원장 Kim Jung Il, 피겨 스케이트의 여왕 Kim Yu-Na 등이 선정된 적이 있다. 이들의 이름표기도 제각각이다.
영어이름 표기는 아무래도 자신의 여권(passport)에 사용된 것을 기준으로 하면 좋을 것이다. 여권의 이름은 해외에서 자신의 신분을 알리는 중요한 증표가 된다. 국내외에서 신분증으로 대신 사용할 수 있다. 항공권 발권은 물론이고 해외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이나 사고를 만났을 때 꼭 필요하다. 해외에서 통장을 만들고 결제할 때는 물론이다.
여권 발급을 담당하는 외교통상부에서는 GILDONG과 같이 붙여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음절 사이에 붙임표를 사용한 GIL-DONG도 허용한다. GIL DONG과 같이 떼어 써도 된다. 다만 여권은 대문자(capital letters)만 사용하므로, 다른 곳에는 Gildong, Gil-dong, Gil Dong과 같이 표기하면 된다. Gil Dong Hong으로 표기할 경우 영어권에서는 Dong을 미들 네임(middle name)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도 유의해야 한다.
여권에는 주민등록증과 마찬가지로 닉네임을 사용할 수 없다. 본명이 박재상인 사람이 평소 싸이(PSY)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고 해서 Psy Park이라고 쓸 수 없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이름과 같은 발음으로 기재해야 한다. 기독교식 이름 김요한이 요한의 표기를 John을 사용할 경우 비자 발급을 해주지 않는 나라도 있다.
유엔사무총장(UN Secretary-General) 반기문은 Ban Ki-moon이라고 쓴다. Ban은 금지, 파문, 추방 같은 부정적인 뜻이 담긴 단어이지만 반 총장은 자기 이름에 아주 떳떳하다. 취임 초기 기자회견 때마다 “내 성은 미스터 밴이 아니라 미스터 반”이라고 고쳐줘야 하는 불편을 겪기는 했다. 사실 영어권에는 Bush(덤불), Slaughter(백정), Smith(대장장이), Blood(피), Stone(돌), Ash(재), Baker(빵 만드는 사람), Clay(진흙), Deadman(죽은 사람), Fishman(어부), Fox(여우) 같은 성도 있지만 그다지 문제 삼지 않는다. 해리 포터(Harry Potter)의 조상은 질그릇이나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신씨 성을 가진 사람이 무심코 Sin이라고 썼다가 후회할 수 있다. 종교나 도덕적인 죄를 뜻하기 때문이다. ‘석’이라는 이름자를 Suck이라 쓰면 ‘빨다’는 뜻이지만 섹스의 특정행위를 일컫는 비어이기도 하다. ‘범’을 Bum이라 쓰면 건달, 양아치, 엉덩이란 뜻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이름표기는 본인이 선택한 스펠링과 순서를 존중해 주는 것이 맞다. 이승만은 Syngman Rhee로 표기했는데, 이를 현재의 표기법으로 고쳐 Lee Seung-man이라고 쓴다면 국제사회에서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같은 박씨라 하더라도 박찬호는 Chanho Park, 박세리는 Seri Pak이라고 달리 쓴다. 우스개로 Park은 남자라서 알(r)이 달려있고 Pak은 여자라서 알을 쓰지 않았을 거라고도 한다. 다만 일가족의 성씨는 통일하는 게 좋다. 정씨 가족의 아버지는 Chung, 아들은 Jung이라고 써 버리면 이 두 사람을 혈연관계로 보지 않을 수 있다.
영어 스펠링은 어떻게 정하면 좋을까? 네이버 검색창에 ‘한글 이름 로마자 표기’라고 입력한 후 한글 이름을 입력하면 여러 가지 용례가 나온다. 여기서 마음에 드는 표기를 하나 골라 쓰면 된다. 필자의 이름 강민수를 넣으면 사용빈도 순서로 Kang Minsoo, Kang Minsu, Gang Minsoo, Gang Minsu라는 대안들이 나온다. 이 경우 특별한 취미나 연고가 있지 않은 한 Gang은 버린다. 조상이 무슨 폭력단 조직이었던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Minsoo Kang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여권을 새로 만들 때는 반드시 기존의 여권과 같은 철자를 써야 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다만 번거로울 뿐이다. 자신의 이름에 ‘재’가 들어있는 사람이 기존 여권의 ‘JAI’를 ‘JAE’로 바꾸고 싶었다. 최초의 여권은 물론 학위증서나 어학성적증서 등에는 ‘JAE’를 사용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외교통상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가서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아직 여권을 만들지 않았다면 영어 이름에 대해 고심을 좀 할 필요가 있겠다. 한번 정하면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권 발급을 여행사에 일임해 버렸다가 두고두고 후회할 수도 있다.
홈페이지를 통해 본 제주도 공기관장들의 이름표기에 문제는 없어 보인다. 아예 영어 이름을 발견할 수 없는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국제자유도시도발센터의 이사장은 이름이 아니라 소속 기관과 직위의 표기와 순서가 잘못되어 있다.
Jeju Free International City
Chairman of the Development Center Board
Kim Han-wook
이 분의 이름으로 나가는 공문이나 명함에도 이처럼 되어 있다면 좀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위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름, 직위, 기관의 순으로 고쳐 써야 한다.
Kim Han-wook
Chairman
Jeju Free International City Development Center
이를 한 줄로 쓸 때는 그냥 Kim Han-wook, Chairman, Jeju Free International City Development Center처럼 콤마만 불이거나 Kim Han-wook, Chairman of Jeju Free International City Development Center라고 쓰면 된다.
☞강민수는?
=잉글리시 멘토스 대표.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며 영자신문 편집장을 지냈다. 대기업 회장실과 특급호텔 홍보실장을 거쳐 어느 영어교재 전문출판사의 초대 편집장과 총괄임원으로 3백여 권의 교재를 만들어 1억불 수출탑을 받는데 기여했다. 어린이를 위한 영어 스토리 Rainbow Readers 42권을 썼고, 제주도와 중앙일보가 공동 주관한 제주문화 콘텐츠 전국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ELT(English Language Teaching)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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