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국 탐라, 조선.항해술도 뛰어났다

  • 등록 2019.06.14 16: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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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 속으로 편입 ... 고려의 지방행정구역 제주군으로 전락

 

탐라교육원에 필자가 첫 출근을 한 것은 1997년 3월이었다. 프랑스어 교사였던 필자에겐 학교와는 사뭇 다른 교육을 펼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설레었던 40대 초반이었다. 파견교사로 발령을 받은 이후 연구사와 연구관으로 세 번이나 탐라교육원에서 근무하였으니 이만한 만남도 흔치 않을 것이다.

 

탐라교육원은 수려한 경관을 관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앞으로는 제주 바다가 뒤로는 한라영봉이, 동으로는 제주의 최장 거리를 자랑하는 한천으로 이어지는 탐라계곡이, 서쪽으로는 열안지 오름이 에워 쌓고 있는 명당이다.

 

학생들이 자연의 품 안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자가 할 일이었다. 수련에 임하는 학생들 더러는 제주가 아닌 탐라라는 이름에 관심을 보였다. 왜 '제주교육원이 아닌 탐라교육원'이냐는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들을 듣고 보니, 이를 그들에게 알리는 것도 필자가 할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제주는 바다 건너에 있는 고을이고, 탐라는 신라와 같은 왕국이었다. 그래서 한라문화제도 탐라문화제로 명칭이 바뀌었다. 탐라왕국은 BC 2337년 시조 고을라(高乙那)왕이 부족국가를 세운 후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중반 고을라의 15세손 고후(高厚)왕에 이르러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그 후 대대로 왕통을 계승하여 내려오다가 고려 초기인 938년 45세손 고자견(高自堅)왕을 마지막으로 고려에 의하여 왕제(王制)가 폐지될 때까지의, 45세 3275년간 에 해당된다고 전하기도 한다.

 

탐라국이 찾은 독자적 생존방식은 조공외교였다. 조공은 복속과 종속의 의미가 아니라, 강대국 주변에 위치한 약소국의 생존방식이었다. 백제와 신라 그리고 조선이 거대한 제국인 중국에 취한 외교전락과 같은 맥락이다.

 

 

삼국사기 백제 문주왕 2년(476년)조에는 ‘탐라국에서 방물(方物)을 바치니 왕은 기뻐하며 사자에게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탐라는 백제에 대한 조공으로 신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고후·고청·고계 삼형제가 통일신라에 조공을 받치러 갔다. 당시 탐라국 사람들은 덕판배라는 배를 타고 송나라, 당나라, 일본과 유구국, 더 멀리 아라비아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할 정도로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났다.

 

탐라에서 한반도 본토로 가는 가장 짧은 뱃길이 닿는 곳이 탐진이다. 탐진은 지금의 탐진강이 흐르는 장성과 장흥, 강진 일대 지역이다. 탐라라는 지명은 바로 탐진의 탐(耽)자와 신라의 라(羅)자에서 비롯되었다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660년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자 백제에 신속(臣屬)하던 탐라국주(耽羅國主) 도동음률이 신라에 내항(來降)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통일신라 멸망 이후 탐라는 고려에 조공했는데, 고려사에는 938년(태조 21년) ‘탐라국 태자 말로가 와서 알현하니 성주와 왕자에게 작위를 내려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938년 고려 태조가 성주·왕자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에서 보듯, 성주·왕자라는 벼슬은 탐라를 다스리는 수령에게 붙여진 명칭이었으며, 1404년(태종 4년) 성주제가 폐지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탐라국이 한반도의 역사 속에 편입되어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 된 것은 1105년(숙종 10년)이다. 이때부터 탐라국은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의 하나인 탐라군으로 바뀌면서 독립적 지위는 막을 내린다. 이어 1214년(고종 원년)에 탐라군을 제주군이라고 고쳐 부르면서 탐라는 제주를 일컫는 지명이 되고 말았다.

 

여몽연합군에 의한 삼별초 정벌 이후, 원의 직할지가 되면서 제주라는 명칭 대신에 탐라라는 호칭을 다시 사용한다. 원이 제주도와 고려의 관계를 차단시키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이후 1294년(충렬왕 20년)에 탐라가 고려에 반환되면서 다시 제주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1295년에는 제주도가 주읍으로 승격되면서 목사가 파견 된다. 전해인 1294년에 충렬왕은 성주 고인단과 탐라왕자 문창유에게 붉은 띠·상아홀(笏)·모자·신발을 한 벌씩 주며 ‘탐라는 이제 우리나라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물품을 준다.’라고 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문영택 yeongtaek241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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