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교육원 본관 지하에 있는 영주10경관은 필자에겐 특별한 곳이다. 2001년 그곳에서 교육연구사로 근무하던 시절, 제주의 정체성 교육을 위한 게시환경으로 영주10경을 한시(漢詩)와 함께 제주도 지도에 디자인하여 게시하였다.
영주(瀛洲)는 신선들이 사는 물가라는 의미를 지닌 제주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기도 한 매계 이한우(이한진)는, 제주도 경치 중에서도 빼어난 경관들을 지역적 특색과 자연의 생성이치를 반영하여 ‘영주10경’을 선정하였다.
그가 10경을 선정한 이치가 매우 오묘하고 논리적이다. 해가 뜨고 지니(성산출일·사봉낙조), 사계절이 운행되고(영구춘화·정방하폭·귤림추색·녹담만설),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니(영실기암·산방굴사) 동식물과 사람이 태어나더라(고수목마·산포조어). 자연철학과 제주의 자연미와 우주의 생성이치를 심오하게 담아낸 것이 영주10경인 것이다.
영주10경에 녹아 있는 제주선인들의 지혜가 놀랍고 자랑스럽다. 다음은 매계 이한우 선생의 한시(漢詩)인 영주10경 중 일부를 발췌하여 우리말과 함께 소개한 글이다.
제1경 성산일출(城山日出)
卽看紅雲頭上起 불현듯 붉은 기운 솟구치고
(즉간홍운두상기)
千門曉色一時開 집집마다 아침 햇살 일시에 비추네
(천문효색일시개)
제2경 사봉낙조(紗峰落照)
海天西垠有高峰 하늘바다 서쪽 언덕 위 높은 봉우리
(해천서은유고봉)
落照蒼蒼畵芙蓉 낙조는 푸른 바다 숲에 부용꽃 그리네
(낙조창창화부용)
제3경 영구춘화(瀛邱春花)
名區天作石門開 신선 사는 곳에 하늘은 돌문을 열고
(명구천작석문개)
百紫千紅滿目來 갖가지 붉은 꽃 온통 눈에 가득 차네
(백자천홍만목래)
제4경 정방하폭(正房夏瀑)
九天河落雷聲鬪 구천에서 울리는 천둥소리인 듯
(구천하락뇌성투)
五月山寒雪影噴 오월 산 차가운 눈보라 뿜어내고
(오월산한설영분)
제5경 귤림추색(橘林秋色)
滿樹玲瓏照夕陽 나무마다 가득히 석양빛 영롱하고
(만수영롱조석양)
家家籬落黃金色 집집마다 황금빛 울타리 둘러치네
(가가리락황금색)
제6경 녹담만설(鹿潭晩雪)
鹿潭五月放新晴 백록담 초여름 맑은 기운 뿜어내고
(녹담오월방신청)
殘雪玲瓏一鏡淸 잔설은 맑은 거울 영롱하게 맺혀있네
(잔설영롱일경청)
제7경 영실기암(靈室奇岩)
撑天護地鍾靈氣 하늘 움키고 땅을 지키는 기운 모으고
(탱천호지종영기)
五百將軍鎭巨山 오백장군은 한라산을 지키네
(오백장군진거산)
제8경 산방굴사(山房窟寺)
穹林哨壁洞天幽 숲 덮인 절벽에 그윽한 동굴 뚫어
(궁림초벽동천유)
古寺荒凉問幾秋 옛 절 허물어져 몇 해련가 황량하네
(고사황량문기추)
제9경 고수목마(古藪牧馬)
食息林間住自由 망아지들 자유롭게 마음껏 뛰놀고
(식식임간주자유)
可宜指設山中鹿 예전 산속 사슴 떼도 저랬겠지
(가의지설산중록)
제10경 산포조어(山浦釣魚)
水暖春晴漁正肥 따사로운 봄날 고기 살찐 바다엔
(수난춘청어정비)
孤舟一葉載蓑衣 외로운 배 도롱이 입고 낚시 드리우네
(고주일엽재사의)
제주인들은 매계의 영주10경을 제주 최고의 ‘시가 있는 풍경’으로 선정하여 오늘도 읊조리고 있다. 이에 더하여 영주12경으로 용연야범(龍淵夜帆)과 서진노성(西鎭老星)을 추가하기도 한다.
탐라교육원 로비에는 또 하나의 명품이 1986년 개원과 함께 게시되고 있다. 제주출신 소암 현중화 서예가가 쓴 글을 대형 목판에 서각한 작품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浮生存沒速流電 부질없는 헛된 삶이 빛처럼 빠르기는
(부생존몰속류전)
脫却籠頭早着忙 몇 푼 벼슬자리에 허둥대는 모습이란
(탈각농두조착망)
鐵壁那邊飜一轉 궁벽한 이곳에서 몸 한 번 돌이키면
(철벽나변번일전)
此時方得到家鄕 마침내 내 고향집으로 가는 것을
(차시방득도가향)
8경과 10경에 대한 단견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숫자가 8과 9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예부터 관동8경, 단양8경, 우도8경 등이 선정되어 회자되고 있다. 중국고사에는 제주를 동영주로 부르기도 했다. 봉래산인 금강산, 방장산인 지리산과 함께 영주산인 한라산이 삼신산 중 하나로 알려질 만큼 수려한 자연이 펼쳐진 곳이 제주다. 그래서 적지 않은 문필가들이 영주8경, 영주12경, 영주10경 등을 한시로 읊었다.
그 가운데서도 영주10경이 제주에서는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다.
영주10경을 지은 사람은 매계 이한우이다. 그는 추사의 제자이면서 혜은 김희정과 난곡 김양수 등과 교류하며, ‘영주의식’이라는 제주의 정체성을 중요시 한 당시의 제주유림과 제주문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숫자 1에서 10까지를 기준으로 하여 헤아릴 때 10은 완성수이며, 모든 수는 1에서 10까지의 기본수를 근간으로 하여 확대재생산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10이라는 숫자는 그 상징성과 시사성이 매우 크다 하겠다. 매계 이한우 선생이 10경을 선정한 이유도 이러한 깊은 뜻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