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서귀포를 아시나요?"

  • 등록 2024.12.26 14:5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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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톺아보기] 서복의 전설(1) ... 진시황 불로초 이야기

서귀포를 아~시나요?

진짜! 서귀포를 아시나요?

 

우리가 살면서 국어 교과서에 발췌된 지문을 조금 읽었을 뿐인데 원작을 다 읽은 듯이 얼렁뚱땅 넘어간다거나, 맛보기 영화 프로그램 주섬주섬 보고 나서 전편 다 봤다는 듯이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부분만 대강 알면서 전부를 훤히 다 안다고 애써 떠벌리기도 한다.

 

서귀포가 고향인 난 단 한 번도 서귀포에 살아본 적이 없다. 1981년 서귀읍과 중문면이 서귀포시로 통합되기 전까진 중문 살다가, 고등학교 진학하면서 제주시로 갔다. 이런 연유로 난 어릴 적부터 대한민국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 이름에 왜 서쪽을 나타내는 ‘서’가 들어갈까? 왜 서귀포하면 항상 ‘칠십리’를 떠올릴까? 왜 어머니는 매년 집에서 직접 한라산 ‘시로미’로 술을 담갔을까? 그게 많이 궁금했다. 다들 아는 척해도 정확히 알진 못하는 눈치다.

 

“서귀포만의 특별함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이해합니다. 서귀포를 안다는 점은 서귀포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과 환경적 특성을 이해하며 서귀포 사람들과 소통한다는 뜻입니다.”

 

2013년 설립된 서귀포 귀농귀촌협동조합 대표 안광희(52)씨의 말이다.

 

진시황 불로초 전설

 

서귀포시 지명유래에는 역사적 사실과 전설 혹은 설화가 뒤섞여 있다. 전설은 상상과 가공이라는 허구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전설을 사실성이 없는 허구로 몰아가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전설은 일정한 사실성과 역사성을 반영한다. 전설은 오래도록 전승되며, 전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게 된다.

 

 

서귀포에는 예부터 ‘서복 전설’이 전해진다. 이는 ‘진시황의 불로초 전설’과 연결되어 있다.

 

기원전 219년, 통일왕조를 건립한 진시황은 순수 길에 올랐다. 동쪽의 군현을 시찰하고 진(秦) 제국의 정통성을 하늘과 땅에 알리는 봉선 의식을 거행하고자 했다. 그가 랑야(산둥성 칭다오시 황다오 연안)에 머물렀을 때 서복(徐福, 徐巿)이라는 방사(도가에 기초한 기술에 통달한 사람)를 만났다.

 

“봉래, 방장, 영주라 불리는 3개 신산(神山)에 동남동녀 5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불사약과 불로초를 구하고 오겠습니다.”

 

진시황은 수천 명의 동남동녀와 3년 동안 먹을 음식과 의복, 약품 등을 실은 대규모 선단을 꾸려주며 동도(東渡)로 출항하도록 허락했다.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복은 고향 북해안의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요동 반도에서 한반도를 지나 일본 규슈에 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최종 목적지로 가는 도중, 서복은 서해를 건너 현재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양아리로 왔다. 그곳 금산 거북바위에 가로 1m, 세로 50cm 크기로 서불과차(徐市過此) 즉 ‘서불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의미의 그림문자를 새겼다(경상남도기념물 제6호). 거제시 해금강에도 서복이 이곳에 잠시 머물 때 남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 서복은 삼신산 중 하나인 영주산에 오르기 위해 제주에 다녀갔다고 전해진다. 서복 일행은 제주도 금당포(조천포)에 도착했다. 서복은 이곳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보고 영주산(신선이 사는 신령한 산이라는 뜻의 한라산의 옛 이름)에 무사히 도착하게 도와주신 천신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드리고, ‘조천(朝天)’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겼다. 아쉽게도 이 바위는 고려 시대 ‘조천관’을 건립하면서 매몰되었다고 한다.

 

서불과지 전설

 

제주에 온 서복 일행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한라산에 오르고 난 후 정방 폭포로 가서 폭포암벽에 ‘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뜻의 ‘서불과지(徐巿過之)’라는 글자를 새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구한 말 제주 학자인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1921년)에 의하면, “1877년 제주 목사 백낙연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 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타고 내려 글자를 탁본했다. 글자는 총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긁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蝌蚪)문자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또한 전설과 역사적 사실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경우라 그 진위를 정확히 파악하긴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서귀(西歸)는 ‘西(서쪽)’도 볼 수 있지만, ‘徐(서 씨)’로 볼 수도 있다는 설이 생겨났다. 서귀포(西歸浦)는 서귀포(徐歸浦)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서귀포’라는 지명은 ‘서시과차지포(西市過此之浦)’, 즉 서시가 이곳을 지나간 포구 혹은 서시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서귀라는 지명이 원나라 가는 고려의 조공선박이 바람을 피하여 홍로천 깊숙이 정박했다가 서쪽으로 갔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중국의 신선 사상

 

서복 일행이 동쪽으로 건너갔다는 서복동도(徐福東渡)는 신선 사상과 관련이 깊다. 불로장생하는 신선의 존재를 믿고 그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는 사상이다. 불로장생 술은 도가의 노자, 장자 사상과 음양오행설, 불교, 유교, 무격신앙 등에서 형성되었다. 신선 사상은 형태를 벗고 귀신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신이 된다(형해소화, 形解銷化)는 데에서 연유된 기복 사상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신선 사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전국시대의 연나라와 제나라이다. 중국사기 봉선서(封禪書)에는 제나라 위왕과 선왕, 연나라 소왕이 신선과 불로장생약이 있다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의 삼신산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봉래는 금강산, 방장은 지리산, 영주는 한라산을 의미한다고 추측하고 있다.

 

제주도와 고대 중국과의 교류

 

제주도와 고대 중국과의 교류가 서복 이후에도 이어졌다는 흔적이 있다. 1928년 제주 산지항 축항 공사 도중 다량 출토된 중국 한(漢)나라 시대의 거울과 칼, 화폐 등이 그 유물이다. 출토된 유물은 오수전(五銖錢)은 4점, 화천(貨泉) 11점, 대천오십(大泉五十) 2매, 화포(貨布) 1매 등 총 18매였다.

 

출토된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후 500년경으로 추측된다. 이 화폐들은 당시 중국에서 시장 경제 수단으로 실제 유통된 화폐로 그 발견은 중국 문물의 파급을 의미한다. 제주도에서 출토된 이러한 유물들은 중국을 기점으로 하는 동방 교역로에 제주가 포함되었음을 의미하며, 새로운 문물이 제주도에 유입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천사나래 주간활동센터 시설장을 맡아 일하며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학기 중에는 제주한라대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


 

진관훈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 j3698202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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