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성의 강한 생활력 ... 뱀 신앙과 맞물려 구체화

  • 등록 2025.05.28 10: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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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톺아보기] 신들의 섬에 나타난 ‘비암’ (2)

 

제주도에는 뱀과 관련한 금기어가 많다. 특히 칠성 본풀이와 토산당 등 뱀 신에 대해 신성시하는 관념이 있어 손가락으로 뱀을 가리키는 등 함부로 건드리거나 사람의 눈에 띄는 일은 좋지 않다고 여겼다. 신앙적 측면에서 뱀은 풍요와 다산, 길흉을 상징한다. 잘 모시면 모신 값을 하고 못 모시면 재앙을 준다고 믿었다.

 

“배염이 집 가지에 ᄌᆞ주 나댕기민 집안에 액운이 싰나”(뱀이 집 처마에 자주 나다니면 집안에 액운이 생긴다), “배염 ᄄᆞ령 죽이민 생살 죄에 걸령 그 사름은 죽은다”(뱀을 때려죽이면 생살 죄에 걸려서 그 사람은 죽는다), “배염을 송끄락으로 ᄀᆞ리치민 송끄락이 썩나”(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 손가락이 썩는다) 등이 대표적인 금기어다.

 

제주에서는 “뱀을 때렸던 막대기는 건드리지도 말라”고 한다. 뱀을 때렸던 막대기는 상대해서는 안 될 막된 사람을 비유한 것으로, 그런 사람을 건드렸다가는 어떤 행패를 부릴지도 모르니, 아예 상대하지 말라는 금기 속담이다. 이처럼 뱀을 금기의 대상으로 경원시했다. 뱀을 괴물로 알고 적대시하여 해치면 우환이 따르므로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했다. 예전에 ‘칠성에 걸린 병’은 칠성인 뱀을 죽였거나 죽은 걸 보았기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뱀을 신성시하며 신앙의 존재로 모시는 문화는 제주도뿐 아니라 전국,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사실 뱀은 세계의 많은 신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담과 이브에 등장하며 이집트의 저승 신인 오시리스의 모습에도 뱀이 있다. 인도 여신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동물도 뱀이다. 중국 최고의 신인 여와는 사람 얼굴에 몸은 뱀이다. 그의 남편 복희도 마찬가지다. 그리스신화에도 메두사는 물론 의신(醫神)인 아스클레피우스의 지팡이에 뱀이 감겨 져 있다.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들고 다니는 마술의 지팡이에는 두 마리의 뱀이 감겨 져 있다.

 

인도에서도 뱀은 여성의 힘으로 상징된다. 최고의 신인 시바의 생명 에너지의 원천은 뱀이 똬리를 튼 모양의 신령스러운 힘, 즉 ‘샥티’이다. ‘샥티’는 우주의 창조적 에너지이면서 동시에 여성적 창조성을 지닌 여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생명에 대한 숭배와 창조, 생산, 영원, 초월, 신비 같은 단어로 묘사되는 뱀은 여신들이 지녔던 위력으로 나타난다.

 

제주도에 뱀 신앙이 보편화 되었던 이유는 ‘ᄌᆞ냥’, 즉 절량(節糧)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ᄌᆞ냥’이란, 식량이나 물건을 비축함을 뜻한다. 제주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근검절약 정신으로 이겨낸 제주 선인들의 ‘ᄌᆞ냥 정신’을 이어받자는 외침이 여전히 높다. ‘ᄌᆞ냥 정신’이란 ‘절량 정신’을 뜻하는 제주어다. 낭비하지 말고 근검, 절약하라는 경고는 어느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보편 규범이다.

 

과거, 스위스에서는 수확기에 어린이들이 길에 떨어진 이삭을 매일 주워와야 그때그때 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호남지방에서도 밥할 때마다 쌀 한 술씩 덜어 부뚜막 한쪽에 있는 ‘좀도리’라 불리는 작은 단지에 비축하는 ‘좀도리(節米)’ 문화가 있었다. ‘좀도리’에 쌀이 꽉 차면, 그 쌀로 가난한 사람이나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제주에는 ‘ᄌᆞ냥’ 문화가 있었다. ‘ᄌᆞ냥’은 ‘고팡’에서 때마다 식량을 조금씩 덜어 ‘ᄌᆞ냥 대바지’(절량 단지)에 모아둠을 말한다.

 

이토록 절약하며 모아둔 귀한 식량을 쥐란 놈이 집안까지 들어와 몰래 훔쳐 간다. 참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농경사회에서 가뜩이나 부족했던 인간의 식량을 빼어가는 쥐를 박멸하는 일은 생존을 위한 ‘필생의 업무’일 수밖에 없다.

 

“‘고팡’의 ‘안칠성’인 뱀은 개나 고양이처럼 인간이 먹는 음식을 주지 않아도 애써 얻은 귀한 식량을 쥐로부터 스스로 지켜주는 고마운 신이다”, 뱀의 신앙적 존재를 문화 지리학적으로 푼 고 송성대 제주대 명예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제주도에서 뱀이야말로 저비용으로 식량을 지킬 수 있는 최상의 이로운 ‘업(業)’으로서의 동물이었다”라고 했다.

 

뱀은 쥐뿐만이 아니라 초가집 처마 밑을 파고드는 새들을 잡아먹거나 쫓아 준다. 그래서 초가지붕 밑에도 뱀이 잘 나타났다. 토산1리 노인회 송도승(82) 회장에 의하면, 예전 뱀은 ‘잣벡’이나 ‘머들’에 많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뱀 먹이가 되는 곤충, 개구리, 쥐들이 많고, 게다가 눅눅하지도 않아 서식환경이 좋았기 때문이다. ‘잣벡’은 밭에 널린 자갈을 모아 밭 바깥쪽에 쌓아 올린 담벼락 혹은 돌무지로 ‘작벡’, ‘작박’, ‘잣담’, ‘잣벡담’이라고도 했다. ‘머들’은 밭 가운데 쌓은 돌무더기이다.

 

제주도에서 뱀은 대부분 여신이다. 뱀 신앙은 치마를 따라 모계 계승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칠성을 모셨던 ‘고팡’이나 장독대, 뒤뜰 등은 주로 여성들의 전유 공간이다. 쥐로부터 식량을 지키는 일 역시 주부 몫이었다. 뱀을 잘 모시지 않으면 큰 재앙을 불러온다고 여겨, 여성들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이 성행했다.

 

신석하 제주국제대 건축과 교수는 “‘고팡’은 단순히 식량 저장창고가 아니다. 공유 저장 공간이다. 제주도는 큰 구들 뒤에 ‘고팡’ 공간을 만들었다. ‘고팡’은 식량을 저장하는 공간이면서 ‘안칠성’을 모시는 공간이다. ‘고팡’ 문은 부(富)의 신이 달아나지 않도록 안쪽으로 연다”라고 했다.

 

제주에는 ‘고팡 물림’이라는 풍습이 있다. 식량 저장 공간인 ‘고팡’을 시어머니가 차기 경제적 실세인 며느리에게 물려준다는 의미다. 그 ‘고팡’에는 ‘안칠성’을 모셨다. 그래서 제주에 뱀 신앙은 남자가 아닌 반드시 식량 관리자인 가정주부, 여성에 의해 지켜져 왔다.

 

이에서 보면 제주 여성의 부지런함과 생명력, 강한 생활력의 이미지가 제주 무속신앙에 많이 반영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문화 지리학자 고 송성대 제주대 명예교수는 “제주도의 경우 여성들의 직접적 노동 참여와 그녀들에 의한 부의 생산이 컸고, 여성이 중심되는 경제, 문화, 생활 현상들이 많았다는 점으로 비추어 볼 때, 제주 여성의 능력과 고유한 존재성에 대한 강조는 뱀 신앙과 맞물리면서 구체화 되었다”라고 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천사나래 주간활동센터 시설장을 맡아 일하며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학기 중에는 제주한라대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

 

진관훈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 j3698202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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