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제주섬 이야기 뭉치를 펼칩니다. 그동안 알았던 제주가 아닌 신비의 세계 뒤에 숨겨진 제주의 이야기와 역사를 풀어냅니다. ‘제주 톺아보기’입니다. 그렇고 그렇게 알고 들었던 제주의 자연·역사, 그리고 문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 가리워진 보석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사회사·경제사·사회복지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박사가 이야기꾼으로 나서 매달 2~3회 이 스토리들을 풀어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애독을 바랍니다./ 편집자 주
식물 사냥꾼, 중국인 윌슨
어니스트 헨리 윌슨은 포리 신부가 보내 준 표본이 아무리 봐도 기존 전나무와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여 자생지에서 직접 확인하고자 1917년 10월, 제주도로 왔다. 그는 타케 신부와 같이 한라산에 올라 포리 신부가 채집했던 한라산 1100~1900m 같은 장소에서 구상나무를 채집하여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 후 연구 끝에 구상나무가 형태적으로 전나무나 분비나무와 전혀 다른 특징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 결과, 윌슨은 제주도 한라산에서 채집한 구상나무를 'Abies koreana E. H. Wilson'이란 학명으로 신종 발표하였다. 속명 ‘Abies’는 전나무를 뜻하는 라틴어로 구상나무가 전나무 속임을 뜻하며, 종속명 ‘koreana’는 ‘한국의’라는 형용사로 원산지가 한국임을 의미한다.
학계에서 구상나무를 명명한 윌슨과 최초 채집자 타케 신부, 포리 신부는 한국의 나무를 세계에 알린 선구자라는 긍정적 평가와 한국의 소중한 식물 자원을 약탈해갔다는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지금 같은 ‘종자 전쟁’ 시대, 다시 한번 되새겨볼 대목이다.
당시 서구는 국가적 차원에서 전 세계에 분포하는 생물들을 대대적으로 수집하여 집중 연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우리나라에 파견된 선교사 신부들이 전교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현지 식물을 채집하여 본국에 보냈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고 이들의 활동을 폄훼하거나 비난하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살아 백 년 죽어 백 년' 한라산 구상나무의 위기
구상나무는 죽는 단계가 있다. 처음에 바로 잎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엽록소를 잃어가면서 차차 갈색으로 변하면서 잎이 이탈된다. 그 다음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하여 하얀 나무만 남는다. 구상나무를 ‘살아 백 년 죽어 백 년’이라 말하는 건, 하얗게 고사목 형태로 상당 기간 한라산에서 유지되기 때문이다.
20년 전만 해도 구상나무는 한라산 등반 때 만나던 최고의 식물경관이었다. 하얀 속살 내비치는 고사한 구상나무는 친근한 한라산 풍경이다. 예전 한라산을 등반한 사람치고 이런 사진 몇 장 없는 사람, 100% 없다.
우리나라 국립공원 100경 중 제14경이 한라산 구상나무 설경이다. 한라산 구상나무는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눈꽃을 피운다. 구상나무에 눈꽃이 오르면 한라산은 겨울 왕국이 된다. 윗세오름을 지나 남벽 분기점으로 가는 등산로의 구상나무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간혹 겨울 한라산 등반 도중 눈보라가 너무 세면 그 나무들 틈에 가서 잠시 강풍과 강설을 피하기도 한다.
한라산에서 구상나무가 사라지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다. 구상나무의 경우, 온난화가 되고 따뜻해지면서 변화가 서서히 이루어지면 상당 부분 적응한 형태로 진화가 될 텐데, 100년 동안 일어날 변화가 10년 이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적응하며 진화할 수 있는 시간을 식물에 주지 않고 있다.
그동안 한라산 구상나무 숲은 제주도 고산지대에서 강한 바람과 얕은 토양층의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며 자생했다. 그러나 최근 급격한 기후변화로 39% 이상 사라졌다. 2013년 국제 자연보전연맹(IUCN)은 한라산 구상나무를 '멸종위기(EN)’종으로 지정했다. 기후변화가 구상나무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이다.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온 상승으로 고산식물인 구상나무가 수분 스트레스 등 자연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2017년부터 제주세계유산본부에서 구상나무숲 변화와 쇠퇴 원인 규명, 복원 등을 위한 종합조사 연구를 진행 중이다. 한라산 어리목 만세동산 등 4개 자생지에 4000그루 시험 식재를 통해 종자 복원에 힘쓰고 있다. 국립생태원에서는 구상나무 배아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했다.
구상나무는 성장 속도가 느린 편이다. 4~5년 키워도 10cm 정도밖에 안 된다. 다른 나무보다 키우는 그 과정도 까다롭다. 토양 등 여러 환경이 잘 마련된 곳에서 증식한 나무를 한라산 중간쯤 가서 적응 실험을 다시 해야 한다. 높은 고지도로 가기 전 어리목 시험포에서 적응 실험을 하며 키우는 작업을 진행하고 나서야 고지대로 올라갈 수 있다.
구상나무는 옮겨심기도 어렵다. 토양을 통해 저지대 씨앗이 옮겨 가거나 저지대에 있는 미생물이 이동되면 안 되기 때문에 이 나무를 키울 수 있는 토양 자체를 다시 구분해야 한다. 또 구상나무는 대부분 포트 형태로 재배된다. 토양이 저지대 흙과 섞이지 않고 완벽하게 소독하거나, 오염을 최소화해야 잘 자라기 때문이다.
2025년 9월, 기후변화 등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한라산 구상나무 보전전략을 논의하는 국제연합산림연구기관(IUFRO) 주관 국제 학술대회가 제주에서 열릴 예정이다. 20여 개국 350여 명의 국내·외 연구자들이 참여해 '구상나무와 유사한 식물들의 변화, 그에 따른 보존 전략, 현지에서 어떻게 보존하고 있는지?'를 주제로 발표하고 토론할 예정이다.
지난해부터 한라산 구상나무 보전을 위해 구상나무에 피해를 주는 병해충 연구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현재까지 확인한 주요 병해충 피해 실태와 위협 수준을 분석하고 시·공간적 변화 양상을 모니터할 계획이다. 또 전염성 병 피해조사와 함께 병원균의 생활사와 유전자 분석으로 신뢰성을 확보하고, 한라산 구상나무에서 채집한 병원균별 위협 수준을 분석할 예정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천사나래 주간활동센터 시설장을 맡아 일하며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학기 중에는 제주한라대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