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첫 여군, 그 뿌리는 해병대 4기였다

  • 등록 2025.04.10 15: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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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톺아보기] 제주여성 126명의 특별한 이야기 (1)

 

1950년 9월 1일, 대한민국 해병 3·4기 3000여 명을 태운 해군 상륙함(LST)이 제주항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진해였다. 이 LST에 탄 해병 4기 가운데 126명은 여성이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대한민국 해병대 병력은 300여 명에 불과했다. 개전 초기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의 공세로 인해 병력 증강이 시급했던 국군은 제주 지역을 중심으로 해병대를 모집했다. 그렇게 모인 해병 3·4기 3000여 명 중, 126명의 여성이 국군 최초 여성해병대다.

 

6‧25 전쟁 발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는 모슬포 1대대를 ‘고길훈 부대’로 명명하고 군산 지역으로 이동했다. 8월 중 제주 도내에서 3000여 명의 지원자가 해병 제3‧4기로 입대했다. 이 해병 제4기에 제주 도내 여중생, 미혼 여교사, 육지에서 제주도로 피난 온 여성 합해 모두 126명이 자원 입대했다.

 

이에는 중학교 교사 1명과 초등학교 교사 약 20명이 포함되어 있었고, 대학생 2~3명과 교사양성소 학생, 나머지는 여중 2, 3학년생이었다. 당시 제주여중, 신성여중, 한림중, 대정중 등에 다니던 2, 3학년 여학생들이었다. 당시 20대 미만 초등학교 현직 미혼 교사도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토는 영남지역 일부와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북한에 점령당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북한군이 제주도에 쳐들어와서 가만히 죽임을 당하느니, 차라리 해병대에 지원해서 북한군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라는 각오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제주 4·3’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되던 때라 '제주도에는 빨갱이들만 있는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지원한 제주 여성들도 있었다. 이와 함께 주변 권유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원한 여성들도 더러 있었다.

 

어린 여학생들의 해병대 지원 소식을 보고받은, 당시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은 “조국의 위기를 앉아서만 볼 수 없다는 그 뜻은 갸륵하지만, 여자가 그 힘든 훈련과 위험한 전투 현장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잘 달래서 돌려보내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얼마 후 생각을 바꿨다. “현장으로 출동하는 남자 해병대원들을 대신하여 여자들에게는 행정, 서무, 그리고 후방지원업무를 맡기면 좋겠다”라며 입대를 허용했다.

 

“1950년이면 내 나이 열일곱 살, 제주여중 2학년이었지. 그해 8월 27일이었던 것 같아, 학교에서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이라고 하더군. 나도 달려갔지. 난 그때도 신장이 170㎝ 정도로 컸는데 나 때문에 뒷사람이 안 보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뒤쪽으로 가려는데, 내가 도망가는 줄 알고 두 사람이 달려와서 잡았어. 그 바람에 내가 제일 먼저 합격했어. 키가 큰 사람을 우선 선발했으니까.”(해병 4기 고순덕, 제주 여성해병대 회장, 제주여중 2학년 입대)

 

“초등학교 6학년 때 ‘제주 4.3’이 일어났어요. 중학교 입학한 후 가담 학생 3명이 총살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해병대 모집에 지원했죠. 당시 교장 선생님은 내가 외동딸이라는 이유로 말리셨고, 약혼한 상태라 부모님도 강력히 말리셨지만, 자원해서 지원했어요.”(해병 4기 장부연, 한림중 3학년 재학 중 입대)

 

“모슬포에 있는 대정중을 졸업 후 보급소를 운영하던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해병모집 공고문을 보고 ‘제주 4.3’ 당시 빨갱이가 싫었는데, 나라를 위해서 내 한목숨 바치겠다는 생각으로 모슬포 경찰서에 가서 지원했어요.”(해병 4기 이순선, 당시 대정중 졸업하고 가사 활동하다 입대).

 

“강정천은 그때도 물이 참 좋았어요. 그곳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학교 직원들 친목회를 했는데 오후가 되니까 급사 직원이 막 뛰어서 오더라고요. ‘강 선생! 여교사 회의가 있으니 준비하세요’라고 했어요. 그래서 모이니 (입대) 준비를 하라는 거에요. 초등학교 교사라고 했지만 20세도 안 되는 어린 나이였죠. 철부지였죠. 어린 나이였으니 산지항을 떠날 때만 해도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컸어요. 평소에도 엄격하시던 아버지는 ‘건강히 잘 다녀오라' 하더군요.”(해병 4기 강길화, 당시 법환초 재직 중 입대)

 

“이북 출신 체육 선생님이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예외 없이 군에 가야 한다면서 거의 강권하다시피 등을 떠밀었어요. 그즈음 끔찍했던 ‘제주 4·3’을 겪으면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생사가 뒤바뀔 수 있다는 걸 아이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싫어도 감히 싫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살벌한 분위기였죠. 나를 포함한 우리 학교 간부 학생들은 그런 강압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부모 형제와 헤어져 진해로 가게 됐습니다. 막내딸을 전쟁터로 보낸 우리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어요.”(해병 4기, 문인순, 중학교 3학년 재학 중 입대)

 

“126명 대원중엔 육지 사람이 여섯 명 섞여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물론 모두 제주 여자들이었죠. 공교롭게도 그 여섯 명 모두가 평안도 출신이었어요. 이북 공산당 아래서 살다가 목숨 걸고 월남했던 사람들이죠. 우리 집은 평안북도 영변이었는데 식구들이 시차를 두고 차례로 38선을 넘어와 뿔뿔이 흩어져 지내다가 한곳에 모여 살았습니다. 오빠는 직업 군인이어서, 당시 인천 기지사령부에서 복무하고 있었고요. 우리 가족은 전쟁이 나자 인천 송도에서 군인 가족들을 태운 LST에 승선해 부산과 진해를 거쳐 제주, 어느 여관에 묵게 됐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거기서 소집영장 비슷한 것을 받았어요. 졸지에 영문도 모르고 군에 가게 된 거죠.”(해병 4기 이효각, 평안도 피난민 출신)

 

“그때 무슨 용기가 솟구쳤던지 내가 앞장서 군에 가겠다고 나섰어요. 철모르던 시절이라선지 그 순간 죽음 따위는 결코, 두렵지 않았죠. 오직 적개심에 불타 내 나라, 우리 강산을 동족의 피로 물들인 빨갱이들의 심장에 총탄을 명중시키고야 말겠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뜻을 같이하겠다는 여학생이 열 명 남짓 나왔어요. 물론 겁에 질려 안 가겠다고 버티면서 우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았죠.”(해병 4기 이수행, 신성여중 3학년 앞두고 입대)

 

“모슬포 초등학교에서 신체검사(제주도립병원장 주관)를 하여 지원자 30여 명 중 13명만 합격했어요. 합격통지를 받고 동네에서 학생, 동네 주민 등이 태극기에 글씨를 써서 주어 머리에 두르고, 8월 27일 제주동초에 집결하여 이발하고 손톱, 발톱, 머리카락을 잘라서 보관했습니다. 이때 어머니께서 오시더니 ‘죽지 말고 살아오라’라는 말을 하고 돌아갔죠.”(이순선, 당시 대정중 졸업하고 가사 활동하다 입대).

 

1950년 8월 27일부터 28일 사이에 입대하여 제주 동초에 집결한 다음 신체검사와 간단한 구두시험을 거쳤다. 합격 판정을 받은 126명은 8월 31일, 제주 북초에서 조촐한 입대식을 가졌다. 이들, 여자해병대원들은 해군 상륙함 LST를 타고 제주항을 떠난 이튿날 진해에 입항했다.

 

“우리 친정아버지가 자식 교육에 대해서는 보통이 넘은 분이거든, 여자나 남자나 다 배워야 한다는 주의셨거든. 어렸을 때부터 대학교 가야 하니까 공부 부지런히 하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하셨어요. 그런데 군대에 가는 나를 보고서도 우리 아버지가 눈물 하나 안 흘리는 거야! 울음이 없으신 거야! 손 한 번 안 흔들어 주시는 거야! 다 해봐야 안다면서, 용감하게 해봐야 한다면서.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라!”(해병 4기 고순덕, 제주 여성해병대 회장, 제주여중 2학년 재학 중 입대)

 

그로부터 40일간 신병훈련이 시작되었다. M1 소총을 들고 제식훈련·총검술·포복 훈련·실제 사격까지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했지만, 여성 지원병 126명은 단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훈련을 마쳤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점은 여자 교관의 엄격한 ‘군기’였다. 땡볕 아래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호된 기합도 받았다.

 

1950년 10월 10일에 수료를 한 이들 여자 해병은 특별중대로 편성되어 진해 해군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이 해군 신병대를 수료할 당시에 전황이 호전되었다. 이에 군에서는 나이가 아주 어리거나 본인이 없으면 집안일을 꾸리기 어려운 대원을 가렸다. 이때 51명은 귀가했다. 고순덕 할머니도 이들과 함께 제주로 돌아왔다고 한다. 나머지 75명은 학력 등을 고려해 계급을 차등 부여하고 진해 해군통제부, 부산 해군본부, 해군 진해병원 등에 배치했다. 행정·보급·정비·헌병·정훈·통신·교환·간호보조 등 다양한 임무가 주어졌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천사나래 주간활동센터 시설장을 맡아 일하며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학기 중에는 제주한라대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
 
 

 

 

진관훈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 j3698202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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