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리불미공예 시연 모습(거푸집에 쇳물을 붓는 모습) [제주도 제공] ](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835/art_17561745777941_be0de7.jpg?iqs=0.882125087973525)
'새벽이 둠북 ᄒᆞᆫ 짐 안 ᄒᆞ여 온 메누리 조반 안 준다(새벽에 모자반 한 짐 안 하고 온 며느리에게는 아침밥을 안 준다).' 제주 도내 해안마을, 특히 구좌읍 일대에서 통용되던 속담이다. 예전 제주에서는 새벽 일찍 바다에 가서 ‘둠북(모자반)’ 한 짐 마련해 오지 않는 며느리는 아침밥을 못 얻어먹었다. 그만큼 부지런하고 생활력 강해야 시집살이 제대로 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비단 며느리만이 아니라 제주 사람 대부분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한라산, 오름, 바당, 산전(山田), ‘드르팟’ 등을 누비고 다녔다. 누구나 ‘오몽(움직임)’할 수 없을 때까지 일했다. 다행히 농업과 어업, 목축업을 주로 하면서도 부업으로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았다.
제주 여성들의 생업(生業)과 부업을 노래한 제주민요 ‘맷돌 노래’ 가사에서 보면, 제주 신들의 고향인 교래, 송당 큰 아기들은 가죽 감태(짐승 털가죽으로 만든 방한모) 쓰고 ‘피(稗)’ 방아 찧으러 다 나갔다. 피는 일곱 차례 찧어야 모두 벗겨져 비로소 먹을 수 있다. 제주에서는 이를 ‘능그기’라 한다. 예전에는 ‘능그기’ 힘들어서 다들 피 농사를 꺼렸다. 서목골(제주시 서문) 큰 아기들은 돼지 창자 훑으러 도축장으로 모두 나갔다. 팔다 남은 돼지 부산물을 가져다가 순대 담거나 ‘몸국(모자반국)’ 혹은 ‘돗국물(돼지 국물)’ 끊여 부모 형제 맛나게 대접했다는 말이다.
성안골(제주시 성안) 큰 아기들은 양태청, 화북 큰 아기들은 탕건청으로 갔다. 조천 큰 아기들은 망건청으로 갔다. 해안마을인 김녕, 월정 큰 아기들은 썩은(?) 고기 팔러 중산간 마을로 갔다. 아마 당시 냉동보관기술이 부족해 생선 신선도가 심하게 떨어졌음을 비아냥거린 듯하다. 하지만 평소 생선이 귀했던 중산간 마을 사람에게는 이마저도 고맙게 느껴졌다. 양태청, 탕건청, 망건청은 예전 동네 여자들이 마을 한곳에 모여 양태, 탕건, 망건, 모자를 만드는 ‘일청’(일종의 공방)이다.
애월, 한림 큰 아기들은 그물 작업, 도두, 이호 큰 아기들은 모자 만들러 갔다. 청수, 저지 큰 아기들은 풀무질하러 갔다. 제주도에서 불미 공예, 풀무질은 처음 흙이 좋은 청수나 저지에서 많이 행해지다가 나중 덕수리로 넘어갔다. 지금도 서귀포시 덕수리 마을회에서 매년 가을 풀무질(불미공예)을 재연하고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 근방 큰 아기들은 자리 짜기, 성산읍 정의(성읍) 큰 아기들은 길쌈 베로 모두 나갔다. 조선 시대에는 제주도에서 대정과 성읍 모두 현(顯) 혹은 읍(邑)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돗자리와 베로 대비 시켜 놓은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인 제주시 오라동 죽성 고다시 큰 아기들은 산딸기, 다래 장사하러 다 나갔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이 지역 특산물이 딸기다. 일명 '아라 주는 딸기'. 제주시 삼양동의 한 마을인 설개와 가물개 큰 아기들은 감티청(감투청)으로, 예전 대나무가 많았던 제주시 봉개동 도련 큰 아기들은 집에서 만든 대나무 그릇 팔러 나갔다.
한림읍 협재와 옹포 큰 아기들은 뗏목 타기 제격, 구좌읍 종달리 큰 아기들은 소금장사 제격, 바닷모래가 많은 이호동에 있는 사수동(砂水洞) 큰 아기들은 모래 운반 제격 등등. 제주도에는 예전부터 소금이 귀했다. 1704년 이형상의 『남환박물』 ‘지산조’에 보면 '물산에 말갈기, 나전(螺鈿), 양태(凉臺), 모자, 땋은 머리가 있다. 면포와 도와(陶瓦), 소금은 심히 적다'라고 하고 있다.
그나마 1900년대 초 종달리 353호 가운데 160명이 소금 생산에 종사했고 소금을 생산하는 가마도 46개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걸쳐 존속된 제주도의 염전들은 해방 이후 육지부 서남해에서 생산된 저렴한 천일염과 외국산 수입 소금이 반입되면서 1950년대를 전후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제주 여성들은 부업으로 송당 되방이(방아) 짓기, 함덕 신짝 부비기(비비기), 고내, 애월 기름장사, 대정 자리(돗자리) 짜기, 김녕, 갈막(구좌읍에 있는 자연마을) 태왁(해녀들이 물질할 때 가슴에 받쳐 물에 뜨게 하는 뒤웅박) 장사, 어등(행원)과 무주(월정) 푸나무 장사, 구좌읍 종달 소금장사, 성산읍 정의 질삼(길삼) 틀기 등과 같이 마을마다 지역 특성에 맞는 가내수공업이나 부업 활동을 통해 소득을 올렸다.
제주산 말총과 대나무(분죽)을 이용한 양태, 갓모자, 탕건, 망건 등과 같은 갓 공예 혹은 관모공예는 해녀 경제가 보편화 되기 전까지만 해도 제주농촌경제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양태, 갓 모자, 탕건 등 관모공예는 조천을 중심으로 신촌, 삼양, 화북과 도두 등 제주시 인근 지역에서 여성들에 의해 행해졌다. 양태는 삼양, 화북, 신촌, 와흘 등지에서, 갓 모자는 도두, 이호, 하귀, 금덕, 광령, 수산 등지에서, 탕건은 화북, 삼양, 도련, 신흥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망건 짜는 작업은 제주시 동쪽 지역인 함덕, 조천 등지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이곳은 바로 제주 관문인 화북포(조천포, 별도포)와 제주항(산지포, 건입포, 산지항)으로 양태 원료인 분죽(粉竹) 공급과 완성된 관모제품을 소비지까지 수송하는 데 수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업들은 시장이 생겨나고 수요가 감소하여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양태, 탕건, 망건, 갓모자 등 관모공예도 일제강점기에 수요가 급속히 감소하자 그 제작기술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에서 양태, 탕건, 망건, 갓모자 등을 만드는 기술이나 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 차원에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정책 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제주지식산업센터 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