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기건(奇虔:?~1460)
조선시대 제주에 부임했던 제주목사는 1392년 조선 개국에서 1910년 합일합방 이전까지 286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전설, 사적 등 제주에 행적이 남겨진 이들을 쫓아 기록한다.
세종 때 제주목사로, 기건(奇虔:?~1460)은 조선시대 제주를 거쳐 간 280여 목사 중 청렴으로 그 이름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성품은 고집스러웠지만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일찍이 안무사가 되었을 때, 제주에서 나는 전복을 바다에서 캐는 것을 백성들이 심히 고통스럽게 여겼다. 건(虔)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이와 같은데, 내가 차마 이것을 먹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결국 먹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청렴함에 감복하였다.’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에 있는 기건에 관한 기술이다.
또한 기건 재임당시 제주에는 사람이 죽으면 관에 넣어 땅에 묻지 않고 골짝의 구덩이에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에 기건이 관을 만들고 염(殮)을 하여 장사 치르는 법을 가르쳤다 한다.
이와 관련한 전설로, 하루는 꿈에 3백여 사람들이 목사 앞에 나타나 고맙다고 절을 하며 말하기를 “공의 음덕을 입어 우리는 햇볕에 드러남을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에게 반드시 현명한 자손이 태어나 집안의 명성을 번창시키도록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기건의 세 아들이 모두 자식이 없었는데, 이 꿈을 꾼 후 아들 찬(穳)이 다섯 아들을 낳았다. 그 중 넷째는 이름이 진(進)이며, 그 아들인 대승(大升)은 문장과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이렇듯 안으로는 청렴하고 밖으로는 인의(仁義)를 숭상하던 그였기에 제주 목사로 부임한 당시 유행한 나병의 현장을 목격하고는 바로 제주.정의․대정의 세 고을에 나병환자전문치료소인 구질막(救疾幕; 병든 환자를 치료하던 숙소)을 설치하여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게 된다.
기건 이전의 나병환자들은 ‘하늘이 내린 형벌’[天刑]을 받아 사지가 썩고 문드러지다 죽어 없어져야 할 미물만도 못한 존재로 여겨졌다. 때문에 부모조차도 이 병에 걸린 자식을 죽여 버리는 등, 여기엔 인륜의 애처로움도, 인간적 동정마저도 철저히 배제되어졌다.
하지만 기건에게 있어 이들은 목민자(牧民者)로써 보듬고 품어줘야 할, 의지할 곳 없는 아픈 병자일 뿐이었다.
결국, 1445년(세종 27) 11월 6일 기건은 다음과 같이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려 임금의 허락을 받게 된다.
‘본주(本州)와 정의·대정에 나병(癩病)이 유행하여, 만일 병에 걸린 자가 있으면 그 전염되는 것을 우려하여 바닷가의 사람 없는 곳에다 두므로,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바위 벼랑에서 떨어져 그 생명을 끊으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신이 중[僧]들로 하여금 뼈를 거두어 묻게 하고, 세 고을에 각각 병을 치료하는 장소를 설치하고 병자를 모아서 의복과 식량과 약물을 주고, 또 목욕하는 기구를 만들어서 의생과 중들로 하여금 맡아 감독하여 치료하게 하는데, 현재 나병 환자 69인 중에서 45인이 나았고, 10인은 아직 낫지 않았으며, 14인은 죽었습니다. 다만 세 고을의 중은 본래 군역(軍役)이 있사온데, 세 고을의 중 각각 한 사람을 군역을 면제하여 항상 의생과 더불어 오로지 치료에 종사하게 하고, 의생도 또한 채용하는 것을 허락하여 권장하게 하소서.”
장계를 올리기 전에 기건은 이미 나병환자를 위한 구질막을 세 고을에 각기 설치하고 전담 승려 각각 1인과 약간 명의 의생을 두어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이 장계는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치료를 기하기 위해 치료에 종사하는 승려에 대한 병역의 면제를 구하는 내용이다.
구질막을 설치한 기건은 본격적인 치료활동으로 남녀를 따로 거처하게 하고, '고삼'이라는 풀의 뿌리를 달인 고삼원(苦蔘元)을 먹이고 바닷물에 목욕시켜 당시 환자의 태반을 고쳤다 한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