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도암선생 김진용(1605~1663)
김진용(1605~1663)은 제주에 유배 온 간옹(艮翁) 이익(李瀷)에게 글을 배워 문장으로 크게 이름 난, 조선 중기 제주의 석학이다.
그는 경서에 밝고 행의(行誼)가 깨끗하였는데 1635년(인조 13년) 진사시에 합격, 1643년 숙녕전(肅寧殿)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후생을 가르치기로 마음먹고 이를 사양, 제주로 귀향하여 제주 삼읍의 어린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다. 이로 인해 제주의 유학은 크게 흥성하게 되었다.
향토사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두 가지, 김진용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제주의 지명이 둘 있다. 하나는 그가 살던 마을인 명도암(明道菴), 또 다른 하나는 오현단이 그것이다.
김진용은 원래 구좌읍 한동리 출신으로, 명도암은 혼인을 하면서 옮겨 살게 된 처가마을이다. 지금은 본래의 이름 명도암보다 ‘조선시대 때 큰 학자 명도암선생이 살았던 마을’인 명도암으로 일반에 더 잘 알려져 있다.
오현단은 원래 귤림서원이 있던 자리다. 그곳에 귤림서원이 들어서게 일을 성사시킨 장본인이 바로 명도암선생 김진용이다.
진사 김진용이 1660년(현종 1)에 목사 이괴에게, 지금 오현단 일대가 세종 때 한성부판윤을 지냈던 고득종(高得宗;1389~1460)의 옛터이고, 또한 “고판윤(高判尹;高得宗)의 두 아들도 문과에 합격하여 조정에서 높이 되어 본디 이름난 터”로 불렸다 하여 그 터를 목사 이괴에게 보여주니 이괴가 흡족해 하며 학사(學舍)인 장수당(藏修堂)을 이곳에 지었는데, 이후 1667년(현종 8) 가락천 동쪽에 있던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인 지금의 오현단 자리에 옮겨 지으면서 사당과 학사가 갖추어진 서원의 구실을 하게 된 것이 귤림서원이고, 1871년(고종 8년)에 전국의 서원이 훼철되자 이곳에 조천의 김희정(金羲正)이 조두석(俎豆石)을 세운 이후 '오현단'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심재 김석익은 『탐라기년』에서 김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김진용의 자는 진숙(晋叔), 본관은 광산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뛰어나 견줄 무리가 없었다. 점점 자라 간옹 이익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스승의 학통을 이었으며 언론(言論)과 풍지(風旨)가 시원스럽게 올발랐다.
인조 을해년(1635)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나아가 성균관에서 공부하였었는데 선비들이 매우 의중(倚重)하게 생각하였다. 계미년(1643)에 추천되어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그의 뜻이 아니었다. 마침내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을 보냈다. 이때 목사 이괴가 학교를 일으키려 할 때 공은 경륜하고 계획하여, 유업(儒業)을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이에 제주도에 유학이 흥기하여 남쪽 풍속이 우뚝하게 크게 변하였다. 현종 계묘년(1663)에 돌아가셨다.
후에 사람들이 (그가) 살던 마을을 따 명도암선생이라 부르고 향사(鄕祠)에서 제사를 모셨다.
아들 계륭(繼隆)의 자는 무경(茂卿), 현종조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벼슬이 예조정랑(禮曺正郞)에 이르렀고 귤림서원의 영수가 되었다. 계창(繼敞)은 형 계륭과 더불어 나란히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전적에 이르렀다. 그 손자 윤주(胤冑)는 무과로 만호(萬戶)가 되었다."
김진용은 목사의 마음마저 움직여 유생들이 공부하는 학사를 짓게 할 정도로 당대 학식과 명망으로 이름났던 인물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1849년(헌종 15) 장인식 목사 때에 고득종의 위패를 모신 향현사(鄕賢祠)에 모셔져 추향하게 되었으니, 지금까지도 고득종과 더불어 제주 향현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