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1550∼1632)
조선시대 이전부터 말은 교통과 군사상의 목적으로 다른 가축과는 달리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탐라가 원에 복속되어 목축이 성행해진 이래 제주는 국력의 상징인 말을 생산해 내는 주요 지역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와서 감목관을 목사가 겸할 만큼 목장의 관리는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였다. 이런 감목관의 자리가 조선 중기에 오면서 경주 김씨에 의해 3백여 년간 세습되기에 이른다.
“정의현(旌義縣)의 김만일이 젊었을 때 어느 날 제주성을 향하여 한라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숲 속에서 수말 한 마리가 울면서 그를 따라오기에, 만일은 그 말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말이 하룻밤을 지내고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러던 몇 달 후 사라졌던 그 말이 암말 8십여 마리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해마다 새끼를 낳았는데 3~4년 사이에 1천 마리가 넘어 산야에 말들이 그득하게 되었다. 산마(山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조선시대 경주 김씨에게 세습되던 감목관(監牧官)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심재 김석익은 [탐라기년]에 김만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만일의 본관은 경주다. 정의현 의귀촌(衣貴村;지금의 의귀리)에 살았는데 집안 재물이 많아 하인이 수백 명이었고, 말이 3천~4천 마리가 있어 산과 들에 널리 펴져 탐라의 세력 있는 가문이 되었다. 일찍이 나라에 가축이 모자란 것을 한탄하여 선조 임금 때에 5백 마리를바치니 동서 별목장(別牧場)에서 기른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그 공로로 지중추(知中樞)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의 벼슬(정2품)을 내리고 숭정대부의 품계를 더하였다.(역자주:왕조실록에는 광해군 12년(1620) 9월조에 보인다. 선조 말은 잘못이다.)
효종 9년(1658)에 김만일의 아들 김대길과 큰 손자 김려가 또 산장(山場:현재의 녹산장)에서 방목하던 2백여 마리를 바쳤다. 이때에 조정에서 김대길을 산마감목관으로 삼고 6품의 관등을 내리고, 특별히 명령하여 그 자손으로 그 직분을 세습하게 하니 이로부터 음사(蔭仕)가 끊이지 않았다. 김대명은 벼슬이 보성군수에 이르니 김대길의 형이다. 김려는 벼슬이 흥덕현감에 이르니 김대길의 아들이다. 김려의 아들 김우천은 숙종 39년(1713)에 본도의 감진(監賑)을 맡아 비축했던 곡식 1백40석을 진휼하는데 도와, 이에 부호군(副護軍)에 가자(加資) 되었고, 우천의 아들 김남헌은 벽사찰방에 가자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군마가 턱없이 부족할 때, 김만일이 조정에 바친 말은 말[言] 그대로 ‘천군만마(千軍萬馬)’였으리라. 그러기에 김만일을 하나같이 ‘일개 섬에 사는 한 백성’에 불과하다하여 광해군이 실직인 지중추 오위도총관을 내리는 것에 대해 조정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총관의 벼슬을 제수 받게 된다. 그의 손자에서부터 세습된 감목관직은 1894년 갑오경장이 되어서야 비로소 없어지게 됐으니, 3백여 년 음사가 끊이지 않았다는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었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