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성주 고인단(高仁旦)
=925년(태조 8) 고려에 방물(方物)을 바치기 시작한 이래, 김통정의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 패하여 1273년(원종 14) 원의 직할령이 되면서부터 탐라는 고려의 부용(附庸)이면서 동시에 100여 년간 원의 직접적 지배를 받게 되는 고달픈 시기였다.
「탐라인물고」에는 고인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고인단은 탐라성주다. 그 선조인 고을나가 탐라의 한라산 아래로 내려와 한 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후세에 이르러 고후(高厚) 고청(高淸)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신라에 입조하니 신라의 왕이 내린 성주의 작호(爵號)를 자손이 세습하였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한 초기에 성주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를 보내어 입조케 하니 이때부터 조공(朝貢)을 비로소 부지런히 하였다. 원종 12년(1271)에 몽고에 저항한 김통정(金通精)이 들어와 노략질을 하며 귀일촌(貴日村;현 애월읍 하귀리)에 웅거(雄據)하고는 이듬해에 안과 밖으로 토성을 쌓아 험난함을 믿고 날로 창궐(猖獗)하였다. 성주 고인단과 왕자 문창우(文昌祐)가 조정에 보고하니 왕이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과 원나라 장수 흔도(忻都)와 홍다구(洪茶邱) 등을 보내어서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충렬왕 2년(1276)에 조정에 드니 왕이 명하여 4품의 관작(官爵)을 주었다. 이 해에 원이 총관부(摠管府)를 두고 고인단을 가자(加資)하여 총관(摠管)으로 삼고 고적(高適)을 총관부(摠管副)로 삼았다. 10년(1284)에 원이 총관부를 안무사(安撫司)로 고치니 인단을 안무사(安撫使)로 고쳐 삼고 (이를) 알리어 밝히는 금패(金牌)를 주면서 명위장군(明威將軍)의 작호를 가자(加資)하고 문창우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18년(1292) 원이 정동행성(征東行省)에서 내린 공문에 의해 (안무사가) 지휘사(指揮使)로 바뀌었다. 20년(1294) 인단과 문창우가 의론하여 원조정에 탐라를 본국에 환속해 주기를 주청(奏請)하였으니 대개 탐라가 김통정의 난 이후로 원에 핍박당하여 예속(隸屬)되어진 때문일 것이다. 겨울 11월에 왕이 통역관(通譯官)인 정공(鄭恭)과 낭장(郞將)인 임양필(任良弼)을 특별히 파견하여 (탐라의 환속을 탐라에 거주하는 몽고인 및 탐라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인단에게 운휘상장군(雲麾上將軍;정3품)을 가자(加資)하고 붉은색의 혁대와 상아로 만든 홀과 모개(帽盖)와 화(靴)를 내리며 조서(詔書)에 말하기를, “공의 집안이 신라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성스런 마음이 진실로 아낄 만하다. 성주의 직위를 영원토록 잃지 말지어다.”
위에 기술된 내용 중 총관부, 정동행성, 지휘사 등에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탐라의 총관부는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관부였고, 장관인 다루가치의 기본적 임무도 군정과 민정의 통할, 그리고 정복지의 질서유지 및 반란방지 등이었다.
정동행성은 원의 세조가 1280년(충렬왕 6년) 제2차 일본 정벌을 준비하며 설치한 기구로, 일본 정벌이 포기된 후에도 그대로 존속되어 이를 통해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려 하였다. 1356년(공민왕 5) 폐지되었다.
지휘사는 원이 일본정벌과 관련해 고려에 요구한 군사 군량 전함을 조달하는 군사행정의 임무를 주로 행하였다.
고인단의 행적은 단순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고려 조정과 다루가치[達魯花赤]로 대변되는 원의 조정 사이, 그 보이지 않는 정치적 압력 아래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당시 탐라 토착세력의 고민과 갈등을 보여주는 사실(史實)이지만, 또한 이를 통해 안팎으로 핍박당하던 옛 탐라인들의 고난의 무게를 가늠케 하는 탐라시절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