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은 김희정(金羲正.1844~1925)
김희정은 조천읍 조천리 출신으로, 자는 우경(佑卿), 호는 해은(海隱) 또는 포규(蒲葵)로 당대 도학(道學)으로는 같은 마을의 소백(小栢) 안달삼(安達三.1837~1886)을, 시학으로는 김희정을 꼽았다 할 정도로 시로 이름을 날렸다. 영주십경을 처음 품제한 매계 이한진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고종 때 제주에 귀양왔던 면암 최익현의 문하이다. 평생 조천에 은거하며 훈학에 종사하였는데 도내 각처에서 찾아와 배운 문하생이 많았다 한다. 1869년(고종6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1871년(고종 8년) 이후 제주 오현(五賢)에 대한 제사를 지낼 곳이 없어지자 1892년(고종 29) 해은의 발의로 오현단을 쌓고 석실서원(石室書院;橘林書院)을 개설하였다. 현 오현단 경내의 조두석(俎豆石)은 해은이 사림의 자문을 얻어 세워 1년에 한 번 오현에 분향 천신(薦新)하도록 한 것이다.
최근 그의 시문집이 발굴되어 필자에 의해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 제주발전연구원, 『제주발전포럼 제41호』(2012. 4)에 게재되었던 해은의 ‘한라산기’를 소개한다(원문 생략).
한라산기
나의 집은 한라산 아래 50리에 있지만 가까이에서 항상 문을 열고 이를 바라본다. 정상은 하늘에 꽂혀 있고 여러 봉우리는 벌려 서있는데, 아침에 햇살이 비쳐도 푸릇한 이내는 여전히 촉촉하고 저녁 석양으로 옮아가면서 자줏빛 노을이 혹은 엉기기도 한다. 맑게 개인 낮에도 구름은 바람이 불어오는 팔방에서 나오고, 가을부터 쌓인 눈은 5월에 이르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숲이 한창일 때면 울창해지고 잎을 떨구면 우뚝 높아져서 깎아 세운 듯한 골짜기의 깊은 계곡과 낭떠러지의 가파른 절벽에 이르기까지 모두 또렷하게 가리킬 수 있으니 문득 ‘지게문으로 다가선 남산이 또렷해지네.’의 구절을, 지팡이를 짚고 나막신을 신어 오르는 수고로움 없이도 방안에 앉아 책상 위의 물건으로 움켜잡는다. 이런 까닭에 일찍이 육지를 유람하면서 호남에서는 월출산을 보았고, 충청도[湖北]에서는 계룡산을 보았고, 서울에서는 남산[終南]과 삼각산을 보았으며, 또 영남에서는 지리산을 보았으면서도 지금까지도 아직 한라산을 오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육지사람 중에 한라산에 대해 묻는 자가 있으면, 둘러대는 말로, “바닥에 서린 둘레는 몇 백 리(里)나 되고, 정상까지는 몇 천 장(丈)이 되고, 백록담은 몇 리나 되고, 괴이하게 생긴 바위는 몇 천 개[頭]나 된다.”고 대답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실로 부끄러워하였다.
지난 을해년(고종 12:1875) 봄에, 면암(勉菴)선생이 귀양이 풀려 돌아가면서 뜻하지 않게 갑자기 산에 오르게 되었는데 일이 있어 따르지 못했다. 이때부터 오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게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다. 올해 여름 스스로 생각하기를,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고, 늙지도 않았는데 쇠약해지고, 마음먹은 뜻도 점점 나태해지고, 다리의 힘은 점점 없어지니 지금을 버리고 유람하지 않는다면 절름발이와 앉은뱅이가 텅 빈 방을 지키는 꼴이 될까 두렵다.’ 하고는, 드디어 실행하기로 결심하고 이기용(李基瑢), 김희선(金熙璿), 김진호(金振鎬)와 그의 아들 시우(時宇)와 서로 약속했다.
기용은 그 아들이 만류하여 그만두었고, 희선은 타고 갈 말을 잃어버려 그만두어 단오날 아침 느지막이 다만 진호 부자와 함께 말을 타고 나섰다. 집아이 항면(恒勉)이 따라가길 원하여 허락했고 하인[下隸] 둘이 또한 따랐다. 같이 길을 떠나는 일행에게 돌아보며, “네 사람이 가려고 했지만 이미 두 사람을 잃었다. 산에 오르는 어려움이 진실로 이와 같구나.” 하였다. 중간에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음산한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저물기 전에 비가 올 것 같았지만 헛되이 돌아가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15리를 가니 괴평촌(怪坪村)에 이르렀다. 비가 올 조짐은 조금 풀렸고 길을 안내해 줄 사냥꾼 몇을 약속대로 만났다. 이에 말을 버리고 지팡이를 짚고 남쪽으로 10여리를 가서 단애봉(丹崖峯)의 절물[寺澗]에 이르러 풀을 깔고 앉아 도시락[簞]을 열고 점심을 먹고는 비로소 산길을 따라 가기 시작했다.
때는 가물어 이슬은 옷을 적시지 않았고 먼지가 발끝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향기로운 풀이 깔리고, 푸른 그늘이 드리운 숲에는 햇빛은 들지 않고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점점 깊이 들어가니 고요하여 사람의 흔적은 없고 다만 하얀 목련만이 그늘진 기슭에 간간이 비치고 먼 숲에서 때때로 꾀꼬리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혹은 지팡이를 짚고 서서, 혹은 돌을 쓸고 앉아서 세상사 잡다한 근심을 풀어버리면서 길이 깊어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수십 리길을 계속해서 가면서 숱한 기암과 골짜기를 지나 저물녘에 산기슭에 이르러 도리석실(道理石室)에 들어가 불을 지펴 밥을 지었다. 잡은 꿩으로 제수(祭羞)를 삼고 물을 술로 삼아 창려(昌黎)가 형악(衡岳)을 지날 때 한 것처럼 마음속으로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빌고는 석실 가에 마련한 한 자리에 돌아와 누워 선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살펴보니, 별은 사라지기 시작하고 구름은 모두 걷히어 맑은 기운이 이미 숲 사이에 드러났다. 기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여 아침밥을 재촉하고 행장을 꾸리니 해는 이미 높이 떠올라 있었다. 아득히 정상을 향해 계속 앞으로 나아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을 둘러보니 길은 없고 구상나무숲이 어지러운 돌들 사이로 두루 가득했다. 쌓인 눈에 눌려서 가지마다 잎들마다 구부러져 거꾸로 늘어져 아래로 드리웠기에 결국 머리를 숙여 꾸부정히 엎드린 자세로 나아갔는데 혹은 가지를 잡아당기며, 혹은 가지를 밟으며, 심지어는 무릎으로 기어가기도 하니 머리와 얼굴이 치이고 옷과 관이 찢어졌다. 그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거꾸러지는 천신만고(千辛萬苦)의 상항을 말로는 할 수가 없었다. 이에 길을 안내하는 자를 꾸짖으며, “촉도(蜀道)가 비록 험난하다고 해도 일찍이 갈고리가 달린 사다리[鉤梯]가 있었고, 태행(太行)이 비록 험난하다 하지만 오히려 수레를 타고 갈 수 있었으니 천하에 본래 길이 없는 곳으로 산을 오르는 자는 있지 않았다. 듣건대, 산 서쪽에 한 줄기 좁은 길이 있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저쪽을 버리고 위태로운 곳으로 사람을 빠뜨리느냐?” 하니, 길을 안내하는 자가 동쪽이 가깝고 서쪽은 멀다고 말하므로, “정상은 지금 얼마쯤 남았느냐?”하고 물었다. 일어나 나무 없는 높은 곳을 가리키며, “정상은 저곳에 있는데 거리로 6~7리입니다.” 하였다.
비로소 구상나무숲 밖으로 나왔는데, 조릿대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길게 자란 것은 한 자[尺] 남짓이고 짧은 것은 몇 마디[村]인데 한 가지 빛깔로 평평하게 펼쳐져 있어 (그 위에) 앉을 수도, 밟고 지나갈 수도 있었다. 곧장 높은 곳에 이르렀는데 중봉(中峰)으로 정상은 아니었고 석실이 하나 있었는데 통궤(通怪)라고 하였다. 땅을 덮어 가린 활꼴모양에 10여 사람을 수용할 만 하였는데 단지 하나의 입구로 통하고 바깥에는 이끼가 끼지 않았고 안에는 고인 물이 있는데 물맛이 맑고 차가웠다. 한라산 중에 기이한 절경으로 하늘이 만든 도인(道人)의 거처로 머뭇거리면서 사방으로 바다를 둘러보았다.
점점 높아질수록 뭇 산들이 모두 낮아지고, 시야가 툭 트여 이미 먼지세상 밖으로 나왔다. 백여 걸음을 옮기니 나무숲이 전과 같아졌는데, 힘은 거의 다하여 한 단계가 한 단계보다 심하였다. 내가 이에 큰 소리로 앞으로 나아가며 “비록 이보다 백배로 험난하다 해도 어찌 중도에 그쳐서 삼태기 하나의 흙이 모자라 공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과 같이 하겠느가?” 하고는 길을 안내하는 자에게 정상이 지금 남은 거리가 얼마인지를 물으니, 일어나 나무가 없는 높은 곳을 가리키며, “정상은 저곳에 있으니, 거리로 몇 리쯤 됩니다.” 하였다.
나무숲이 다한 곳에 또 조릿대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곧장 높은 곳에 도착하니 중봉(中峰)의 꼭대기로 정상은 아니었다. 잠시 쉬었다가 나아가다 또 나무숲 속으로 들어가 3~4리를 가서 길을 안내하는 자에게 정상이 남은 거리가 얼마쯤인지 물으니, 일어나 나무가 없는 높은 곳을 가리키며, “정상은 저곳에 있습니다. 지금 이후에 진짜 정상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마음은 바빠지고 서둘러져 크게 힘을 내니 몸의 위태로움과 지세의 험난함을 알지 못했다. 나무숲이 다한 곳에 또 조릿대 숲인데 우러러 바라보니 정상은 하늘 위로 멀리 나타났다. 우뚝 솟아 그득하고, 둥긋하여 넉넉하니 하늘 남쪽의 원기(元氣)가 이곳에다가 다 부어진 듯하다. 동남쪽은 전부 돌로 된 골격이 드러났고, 서북쪽은 흙과 돌이 서로 섞여 있으면서 풀과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오직 당귀와 만향(蔓香)만이 간혹 바위 사이에서 무성하고 진달래와 작약이 숲 아래에서 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리를 믿고 오르니 형세가 비록 험준하였지만 나무숲에 비교하면 쉽기가 평지와 같았다. 정상에 이르니 갑자기 가운데가 텅 비었는데 사면이 석벽으로 둘러싸였고 둘레가 1리쯤 되었다. 북쪽 가에 물이 있는데 곧 백록담으로 얼었던 눈이 비로소 녹기 시작하고 있었고, 머물던 안개가 모두 사라져 맑고 깨끗하기가 한 점 티끌도 없으니 정말로 별천지였다. 이에 마음은 황홀해지고 온몸의 털은 곤두서며 멍하니 스스로를 잊게 되니, 백록이 물을 마시다 홀연히 흩어지고 뭇 신선이 평상을 옮겨 잠깐 사이에 숨어버린 것 같았다.
일행이 모두 벼랑을 따라 내려가서는 줄줄이 백록담 변에 앉으니 저절로 공경하고 두려워할 줄을 알아 감히 떠들어대는 자가 없었다. 시험 삼아 한 바가지를 마셔보니 가슴이 상쾌해지고 세속의 때가 씻겨 지니 빙옥(氷玉)을 삼켜 넘기는 듯했다. 길을 안내해 준 자가 일어나, “저는 다른 사람을 안내하며 열 번을 이곳에 왔었는데, 혹은 구름이 안개에 덮여서, 혹은 비바람에 막혀서 하늘과 땅이 열려 걷힌 것이 오늘과 같은 날이 있지 않았습니다.” 하며 축하해 주었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