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직 왕자(王子) 작위 오른 문씨 가문

  • 등록 2012.01.07 1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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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씨 가문의 왕자들...문창우,공제,신보,충세

 문씨 가문의 왕자들  - 문창우 ․ 문공제 ․ 문신보 ․ 문충세

 


 

  신라가 한창 번성하던 때에 삼신인(三神人)의 맏이인 고을라의 15대 손 고청(高淸)이 신라의 왕에게 받아 세습되던 왕자의 작위가 고려에 와서 문씨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탐라의 토착세력으로 성주(星主)와 함께 최고위층에 속했던 왕자(王子). 아래의 이야기는 이 중 문씨 왕자에 대한 이야기다.

 


 심재는「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문공제는 왕자 창우(昌祐)의 아들이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한 초기에 (전라의) 보성군(寶城郡)에 있던 (중국의) 복성현(福城縣) 사람이 (탐라로 건너) 와서 고씨(高氏)에게 의탁하니 자손이 번성하였다. 창우 때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현달(顯達)하니 왕자의 작위를 세습하기 시작하였다. (창우는)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원나라 조정(탐라가 원의 직할령이 되었을 때)에서 총관(摠官)과 안무사(安撫使)를 지냈다. 충렬왕 20년(1294)에 창우가 성주 고인단과 함께 원나라 조정에 탐라를 본국에 되돌려 줄 것을 청하였다. 탐라가 삼별초란 이후로 원나라에 핍박되어 예속된 까닭이다. 왕이 이를 듣고는 붉은색의 혁대[紅鞓]와 상아로 만든 홀[牙笏]과 모개(帽盖)와 화(靴)를 특별히 하사하고 격려하였다.

 

 공제는 (창우의 뒤를 이어)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니, 충숙왕 5년(1318)에 초적(草賊) 사용(士用)과 금성(金成) 등이 난을 일으켜 지방관을 쫓아냄에 공제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하고는 조정에 아뢰니 (조정에서)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제의 손자는 신보(臣輔)다. 공민왕 21년(1372)에 목호 석가을비(石加乙碑) 초고도(肖古道) 보개(甫介) 등이 스스로를 동서합적(東西哈赤)이라 칭하고 어마사(御馬使) 유경원(劉景元)과 목사 이용장(李用藏)을 죽여 반란하였다. 신보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하고 판관 문서봉(文瑞鳳)을 임시 목사로 천거하는 일로 그의 동생 신필(臣弼)을 보내어 왕에게 하명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우왕 원년(1376)에 토적(土賊) 차현유(車玄有) 등이 난을 일으켜 관청을 불사르고, 안무사 임원(林完)과 목사 박윤청(朴允淸)을 살해하였다. 신보가 성주 고보개(高寶開)와 더불어 계략을 세워 적당(賊黨)을 토벌하기를 청하니 토적의 무리가 이를 알고는 두 사람의 집을 삼일 간 포위하여 소ㆍ 말ㆍ 양ㆍ 닭ㆍ 개ㆍ 돼지 등을 다 죽여버렸다. 신보 등이 겨우 몸을 피하고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하였다.

 

 신보에게는 아들 충걸(忠傑)과 충세(忠世)가 있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 2년(1402) 10월에 충세가 성주 고봉례(高鳳禮)와 함께 의논하여 속국(屬國)이 되기를 청하였다. 이에 비로소 (왕자의 칭호를) 내리고 우도지관(右都知管)이 되었다."- 원문, 심재집2, p.396

 


 

  고려의 부용(附庸)이 되고, 삼별초의 난을 맞아 원나라에 예속되었다가 조선의 속국이 되기까지 문씨 왕자들의 영욕의 세월은 탐라와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한 것이었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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