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림서원 터가 된 명당의 주역

  • 등록 2012.01.27 14:4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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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필,태정,태보,태익...고득종의 네 아들

 고득종의 네 아들...태필 ․ 태정 ․ 태보 ․ 태익

 


 

“성 남쪽에 버려진 터가 하나 있는데, 옛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현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고득종의 옛터입니다. 고 판윤의 두 아들도 문과에 합격하여 조정에서 높이 되었기에 본디 이름난 터라고 불렸습니다.”

 


 

 훗날 명도암선생(明道菴先生)으로 불려진 제주의 선비 김진용(金晉鎔)이 당시의 목사 이괴(李襘:1658.4~1660.5재임)에게 학사(學舍)를 짓되 고득종의 집터에다 세울 것을 권유하며 한 말이다.

 


 

 심재는 고득종의 네 아들에 대해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태필(高台弼)은 판서 득종(得宗)의 아들이다. 세종 때에 부모의 덕[蔭仕]으로 현감이 되었다. 문종 신미년(1451), (전라도) 광양의 원님[倅]으로 있으면서 과거에 합격, 이후로 한성좌윤(漢城左尹;종2품), 전라감사(全羅監司;종2품), 개성유수(開城留守;종2품), 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 지중추(知中樞;종2품)로 자리를 옮겼다.

 

 세조 정해년(1467) 때 나라에서 건주(建州)의 여진족 추장인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였다. 공은 이조참판으로 임금의 궁궐로 달려가 잡은 포로를 바치고 묘사(廟社;祠堂)에 전쟁의 승리를 보고하였다.

 

 성종 때 일본이 귤나무를 바치고, 유구국(琉球國, 지금의 오키나와)에서 기이한 나무를 바쳤다. 대사헌(大司憲) 허침(許琛) 등이 그것들이 쓸모가 없는 것이라 하여 이를 물리칠 것을 임금께 아뢰었다. (이때에) 공이 (또한)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신은 제주인입니다. 본주에서 진상하는 진주와 앵무배(鸚鵡杯)는 제주사람들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 많습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이는 국가의 쓰임에 소용이 없는데도 백성들에게 폐해가 이르게 한다.” 하고 진상하는 것을 없애게 하였다.

 

 공의 형제 4인은 모두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청환(淸宦:지위가 낮고 녹(祿)이 많지 아니하나 뒷날에 높이 될 좋은 벼슬)과 현직(顯職:높은 벼슬)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태정(台鼎)은 세조 기묘년(1459)에 수석 급제하여 관직이 봉상시정(奉常寺正;정3품)에 이르렀고, 태보(台輔)는 음사(蔭仕)로 관직이 복판(僕判)에 이르렀으며, 태익(台翼)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사간(司諫;종3품)에 이르렀다.’(원문, 심재집 2, 399쪽)

 


 

 고득종의 옛 집터가 명당으로 소문날 만하다. 결국 1660년(현종 1) 목사 이괴(李襘)는 이곳에 장수당(藏修堂)을 짓고 제주 ․ 정의 ․ 대정의 세 고을에서 내로라하는 유생(儒生)들을 모아 학업에 정진하게 하였다. 이후 고득종의 옛 집터엔 귤림서원이 세워지고, 구한말 오현단으로 이어지며 제주 유림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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